오랜만에 아들 집에 오니 빨래가 산더미다. 학과 공부에 과제, 실험을 위한 시험 준비와 매끼 식사며 청소까지 해야 하니 매일 쌓이는 빨래를 차곡차곡 모아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렵게 얻은 자취방이지만 세탁기가 없는 곳이라 빨래방을 찾아야 한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10분 거리에 있고 15분 거리에 또 한 곳이 있다. 먼 곳에 있는 빨래방의 리뷰가 좋지만 오늘은 10분 거리의 빨래방으로 가기로 한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고 가는 10분은 꽤 멀게 느껴진다. 더구나 오후 4시가 되니 독일의 서늘한 가을바람이 몸속을 파고든다.
빨래방에 들어서니 세탁기 15대가 놓여있다. 건조기 4대와 대형 세탁기 6대가 안쪽에 있는데 대기 의자는 단 3개뿐.입구에 세탁비는 1.9유로라고 큼지막하게 쓰여있다.
10번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고 돈을 지불하려 하는데 작동이 안 된다. 어르신 한분이 다가와서 설명을 해준다.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더니 오전 11시까지 1.9유로이고 그 이외 시간은 2.5유로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다른 곳으로 가 볼까 하다가 그곳도 큰 차이는 없을 듯하여 그냥 여기서 하기로 했다.
우선 동그란 트롬 세탁기 문을 열고 빨랫감을 밀어 넣는다. 문을 꼭 닫고 온도를 설정한다. 세제를 넣고 계산대에서 번호를 입력하고 돈을 넣으면 시원스레 물이 뿜어져 나오며 세탁이 시작된다. 할 것 많은 아들은 한 시간을 이곳에서 허비할 수 없어 집으로 보냈다.
빨래를 기다리며 이곳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꽤 많은 사람들이 빨래를 들고 이곳을 찾아온다. 반창 통 같은 곳에 가루 세제를 담아 온 사람. 커다란 세제를 통째로 가져온 사람, 비닐장갑에 물비누를 가져온 사람도 있다. 0.5유로나 되는 비싼 세제를 사서 쓰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15대나 되는 세탁기가 모두 찼다. 토요일이라 빨래하는 날인가 보다. 나이 지긋한 남자분이 다가와 뭔가 얘기를 건넨다. 아마 가격을 물어보는 것 같다. 11시 이후 세탁비용 적어 놓은 곳을 손으로 짚어 주었다. “당케 쉔” “당케”
깨끗하게 빨아진 세탁물을 가져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키가 2미터는 됨직한 남자분이 세탁기를 열어 빨래를 꺼낸다. 하나씩 탁탁 털어 커다란 가방에 얌전히 넣는다. 집에 가져가서 빨래대에 널 때 기분 좋겠다. 나도 저렇게 가져가야 하나.
세탁이 미처 끝나기 전에 찾으러 온 사람도 있다. 세탁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몇 분을 그대로 서 있다. 엉킨 세탁물을 메고 온 가방에 그대로 쑤셔 넣는다. 그래도 그에게서는 향긋한 세제 향이 난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다. 앉을 곳도 없는 작은 공간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공부에 바쁜 아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빨래를 마친 세탁기들이 동작을 멈춘 채 다음 손님을 기다린다. 토요일 오후는 빨래방이 바쁜 날이다.
세탁기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깨끗이 빨아지고 있는 빨래를 보니 마음도 상쾌해진다. 오늘은 왠지 얼큰한 김치찌개가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