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떻게 벌써 왔댜? 내일 오는 거 아니랴? 날도 추운데 방에 군불부터 지펴야겠구먼.”
출발할 때 전화를 드렸는데 그새 잊은 건지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집어던지며 우리를 맞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궁이에 장작을 들이밀고 있는데 방에서 전기 수리하던 남편이 소리친다.
“그만 때. 장판 다 눌어붙겠어.”
몇 년 전에 보일러 방으로 고쳐 드렸는데 어머니는 기름 닳는 게 아깝다고 작은방에 불을 때며 생활한다. 이번 설에도 뜨거운 아랫목에서 이리저리 뒹굴 거리다 밤을 홀딱 새웠다. 오래된 아궁이지만 불길이 잘 들어 방은 쩔쩔 끓는다. 바닥이 뜨겁다고 하는데도 시골집은 웃풍이 심하다며 두꺼운 이불을 한 장 더 얹어준다. 날바닥에서 자야 건강에 좋다고 우기는 어머니 덕에 종아리에 화상 자국을 만들고 말았다.
어머니는 사십 갓 넘긴 나이에 이름 모를 병으로 쓰러진 남편을 여의고 다섯 남매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하며 모진 세월을 견뎌왔다. 그러다 보니 억척스러움이 몸에 배어 목소리에 여장군의 기백이 서려있다.
결혼 후 추석을 맞아 시댁에 갔다. 신행 이후 처음 맞는 명절이라 낯섦과 긴장감으로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전당 잡은 촛대 같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 있는 내게 어머니는 밭에 나가 졸이나 한 줌 뜯어오라고 했다. 졸? 처음 들어보는 말이고 무엇인지 몰라 조심스레 되물었다. 어머니는 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는 않고 가느다란 졸도 모르냐고 핀잔을 준다. 남편과 시누이들에게 어머니의 무뚝뚝함과 화통 같은 목소리에 대해 누차 들었지만 그 순간 심장은 마구 방망이질을 해댄다. 얼른 대문 밖으로 나왔다.
밭에는 초등학교 신입생 같은 초록 채소들이 바람결에 잎을 흔들며 담임선생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나와 눈을 맞추려 한다. 가느다란 잎을 찾았다. 파도 있고 부추도 있고, 어린 배춧잎조차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잎이 가느다란 파 한 줌, 부추 한 줌을 뜯어 돌아 서려다 소나무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추석이니 송편을 만들 것이고 송편에는 당연히 솔잎이 필요할 터. 졸은 어감 상 솔과 비슷하니 솔잎이 틀림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날 데려가라는 듯 낮게 손 벌리고 있는 초록 잎을 뽑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떡을 좋아해서 분명 송편을 많이 빚을 것이라는 짐작에 바구니 가득 솔잎을 채워갔다. 이만하면 충분할 것이라 여겨 바구니를 안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솔잎은 산 깊은 데서 깨끗한 것으로 잔뜩 뜯어 왔는데 졸은 안 뜯어 오고 왜 길옆에 있는 깨끗하지도 않은 것을 뜯어 왔냐며 지청구다. 얼른 파를 내밀었다. 이건 또 왜 뜯어왔냐고 해서 이번엔 부추를 내밀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게 졸이잖아. 졸 김치도 안 먹어 봤니?” 한다.
저녁때 송편을 빚으며 대뜸 쌀 팔아먹었냐고 묻는다. 농사짓는 시댁에서 쌀을 가져다 먹고 있는데 추석 전에 쌀이 떨어져서 쌀을 조금 샀다. 그런데 쌀을 팔았냐고 묻기에 안 팔았다고 했더니 추석 때 주려고 아직 안 줬는데 쌀도 안 팔고 뭐 먹고살았냐고 한다. 쌀이 떨어져서 팔아먹진 않고 사 먹었다고 하며 어물어물거렸다.
“쌀팔았구먼. 왜 안 팔았다고 햐.” 하며 또 역정이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인지. 성격이 급한 어머니는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소리부터 지르기 때문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하는데 횡설 수설하고 있었다. 내가 외국에 시집온 것도 아니고 경기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충청도로 왔건만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대략 난감이었다.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던 남편이 대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쌀을 다 먹어서 조금 팔아먹었다고 대답한다. 없는 쌀을 어떻게 팔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 내게 충청도에선 쌀 사 먹는 것을 쌀팔았다고 한다며 설명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남편에게 꼼짝 말고 옆에서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꽈리고추를 딸 때였다. 꽈리고추는 연약하니 끝을 잘 잡고 조심스레 따야 한다며 어머니는 여러 차례 당부를 했다. 갓난아기 손 만지듯 조심스레 잘 따다가 어머니가 곁에 왔을 때 그만 줄기 부분을 똑 따 버리고 말았다.
“아이고 고추 다 버리겄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따버리면 쓰겄냐.” 며 불호령을 내리는 찰나 두 번째 고춧대도 어머니 앞에서 댕강 잘리고 말았다. 덕분에 고추밭에서 쫓겨났고, 대신 문풍지에 바를 꽃잎을 따라는 것이다.
시댁 마당에는 맨드라미, 봉숭아, 달리아 등 내 속마음처럼 붉은 꽃잎들이 얼굴을 자랑하고 있었다.
문풍지에 예쁘게 수놓을 것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꽃잎을 떼어냈다. 서로 얼굴을 내밀며 내 손에 뽑히기를 기대하는 것 같아 꽃들과 눈도 마주치고 대화하며 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고추를 다 땄는지 어머니가 곁에 오더니 "언제 다하려고 꾸물 대냐"며 우악스럽게 꽃목 몇 개를 잘라댔다. 어머니 손에 붙잡힌 꽃들은 포로처럼 파르라니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딱 다섯 잎만 뽑더니 꽃밭으로 휙 집어던진다. 내가 꽃밭에 버려진 것 같아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풀 먹인 창호 지위에 꽃잎 몇 장 올려놓았다. 앙상하던 문살에 꽃잎 먹은 창호지를 입히니 수줍은 새색시 방이 되었다. 죽어가던 꽃잎들은 창호지 위에서 살아나 문을 열 때마다 꽃향기를 방안으로 초대한다. 시골집 대청마루는 향긋한 꽃밭이 되었다. 어머니 목소리조차 향기롭게 들려온다.
긴장하고 조심한 탓에 어머니 눈에는 바지런한 며느리의 모습으로 비치는가 싶더니 대청마루를 청소할 때 또 어머니의 눈에 났다. 깔끔한 어머님은 마루를 청소하는데도 네 번의 단계를 거쳐야 안심이다. 빗자루로 쓸고 찬 물걸레질 한번, 뜨거운 물에 튀긴(어머니 표현) 걸레질 한 번 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른걸레질로 마무리. 그래야 마루 청소는 끝이 나고 방 청소도 같은 방법으로 해야만 한다.
빨랫줄에 새하얗게 걸려있는 것들 중에 어떤 것이 걸레인지 알 수가 없다. 하얗게 빛나는 수건들도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빨래 방망이로 여러 번 두들겨 맞은 탓이다. 걸레와 수건, 행주는 뜨거운 물에 튀겨 방망이질 열 번 이상을 거쳐야 비로소 빨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 집은 불을 때며 사는데도 티끌 하나 없이 정갈하고 깔끔하다. 단정하게 정리된 부엌 도구들, 아궁이에 나란히 걸려 있는 가마솥 뚜껑도 기름을 바른 듯 반들반들 윤기가 흐른다. 그래서 시댁에 들어설 때부터 긴장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어머니 집은 정신이 없다. 가재도구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길 잃은 아이처럼 울상이고 물건 박스들과 비닐들이 바람에 나뒹굴고 있다.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로 늘 까맣게 염색한 어머니였는데 흰머리가 무성하여 야위고 수척해 보이기까지 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손주들과 영상 통화를 하는데 손 전화를 자꾸만 귀로 가져간다.
“내 목소리 들리냐?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차 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어. 니들이 안 오니께 할미가 여기저기 아프고 암 것도 하고 싶지 않어. 여름방학 때 꼭 와라. 할미가 니들 좋아하는 졸 김치 많이 담가 놓을 텐께. 공부 잘혀.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 끊어라.”
어머니 목소리가 다시 살아났다. 긴장해야 한다. 어머니 대신 정갈하게 빨아 널은 새하얀 수건들이 제 잘난 듯 바람결에 춤을 춘다. 지난 추석 이후 광에 처박혀 있다가 얼굴을 내민 그릇들이 상에 올랐다가 말갛게 세수를 하고 장독대 곁에서 볕을 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