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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Oct 27. 2020

국화 언니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한 시간 거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다니. 차려입은 검은 정장만큼 마음이 어둡다. 진한 국화꽃 향기를 맡으며 그녀의 이름을 찾다. 빼곡하게 들어 찬 조문화환은 평소 그녀의 사람 좋아함을 짐작할 수 있다. 오른쪽 팔에 두 줄의 완장을 찬 하얀 얼굴의 남자가 다소곳이 인사를 한다. 짐작만으로도 그녀의 아들임을 느낄 수 있다. 찾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조용히 다가와 앉는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동안 그녀와 함께 했던 날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선지동산이라 불리던 숲 속의 작은 학교.

아직은 앙상하지만 건물을 다 가려 숨바꼭질하듯 팔 벌리고 있는 나무들, 벌과 나비들을 끌어 모아 잔치를 준비하는 들꽃들 분주하다. 막 연둣빛 싹을  나무 사이로 새들의 합창소리 들리는 곳. 우리는 이곳을 에덴동산이라 불렀다. 햇살이 노닐다 간 잔디밭엔 댓 명씩 모여 앉아 열띤 토론이 한창이다. 커다란 나무 밑동에는 한쌍의 청설모가 커플들의 속삭임이 궁금한 듯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있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예배당 문을 열었다.

탁탁탁…….

카라꽃 밑둥자르던 그녀가 웃음으로 나를 맞아 준다. 부활절을 맞아 강단에 꽃꽂이를 하고 있었단다. 매주 모두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준 것이 그녀의 숨은 정성 덕분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녀의 손을 거치니 꽃들은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된다.

  수업시간에도 그녀는 흐트러짐이 없다. 늘 맨 앞에 앉아 반듯한 자세로 집중을 한다. 강의를 듣는 그녀의 눈은 먹이를 찾는 맹수의 눈빛이 된다. 수업이 끝나도 교수님은 그냥 갈 수가 없다.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야 비로소 교실 문을 열 수 있다. 그녀의 열정은 이미 학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남학생들에 비해 숫자가 적은 여학생들은 가끔 우리끼리의 모임을 만들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엔 학교 근처 계곡으로 가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 그녀가 들고 온 찬합에는 정갈하게 썰어 온 오이며 당근, 양파들이 한가득이다. 깨끗이 씻은 스레트 위에 돼지고기를 올려놓고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맞추어 흥겨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자력으로 학비를 내야 했던 나는 기숙사비까지 낼 수가 없어 4시간 거리를 통학했다. 그러다보니 여학생 모임이 있던 날은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했다. 그녀의 집은 늘 깨끗하면서도 포근했다.

  어느 날 기숙사 총무가 다가와 언제 입사할 거냐고 물었다. 누군가 기숙사비를 대신 냈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냈는지 말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절대로 알려 줄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알아야 감사 표시를 할 수 있지 않냐고 했더니 학교생활 재미있게 하라는 말 뿐이었다고, 순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만 둘 있어서 딸 삼고 싶다며 하얗게 웃던 그녀.

  그녀의 이름은 ‘국자’다. 입학 첫날,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자기 이름은 국자라고 했다. 우리는 소리 없이 웃었다. 국자처럼 따끈한 국물을 다른 사람들의 그릇에 담아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숙연해졌다. 그녀가 맞을 거야. 국자 언니라고 부르기 민망해서 국화 언니로 통했던 그녀.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하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 후로 매 학기마다 선불로 내주는 키다리 아저씨 덕분에 3학년 1학기까지 걱정 없이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학기부터는 기숙사 총무를 하여 기숙사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학기를 시작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서는 학내 부정입학, 재정 비리 문제와 더불어 대외적으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으로 데모가 시작되었다. 책걸상이 교실 뒤로 물리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운동장을 돌며 독재타도, 비리 척결을 외쳤다.

  책상 하나가 교실 맨 앞자리에 놓였다. 그녀가 늘 앉던 자리이다. 그녀는 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 수업을 받겠다고 했다. 그때 그녀 나이 47세. 막내아들보다 어린 나이의 동급생들과 치열한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텅 빈 교실을 지켜 온 그녀는 고집불통,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아줌마라는 이미지로 남았다. 학내문제로 휴학을 하거나 제적당한 학생들이 있어서 학교 분위기는 처음처럼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졸업 후 각자 삶이 바빠 서로의 소식도 모르고 지내오다가 그녀의 부고 소식을 들은 후에야 나의 무심함에 가슴을 쳤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꽃꽂이를 하고 싶다며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꽃을 한 아름 안고 쓰러져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꽃을 그리 좋아하더니 꽃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국화 언니는 5년 전부터 우리 집으로부터 30분 거리에 살고 있었다는데. 지척에 두고도 찾아뵙지 못한 송구함이 국화꽃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언니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마저 사라지게 한다. 언제 다시 만나 삼겹살이나 구워 먹으며 추억을 떠올려 보자고 말만 하다가 영원히 끝나 버리고 만 것이다.   

  국화 언니 영정 앞에 다시 모인 여학생들. 아니, 국화 언니가 입학했을 때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중년의 아줌마들이 30여 년 전의 추억을 돌아보며 씁쓸한 미소를 흘려보낸다. 국화 언니도 오랜만에 함께 만나니 정말 좋다고, 실컷 이야기 나누다 가라고 국화꽃 사이에서 환하게 웃어주었다.

  

  교회 강단에 꽃꽂이를 하다가 국화 언니, 아니 국자 언니가 문득 보고 싶어 진다.

 ‘잊히기 전까지는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다’ 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그리운 이에 대한 고마움과 보고 싶음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면 그리운 이는 내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언니를 닮은 하얀 카라꽃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도 웃는다. 진한 꽃향기가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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