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입시 제도는, 해양대학과 삼군 사관학교는 특차였고, 서울의 일류 대학들과 지방의 국립대학들은 1차, 나머지 대학들은 2차로, 시험 시기가 나눠져 있었다.
특차 합격자도 1, 2차에 모두 응시할 수는 있었지만, 1차는 바로 연이어져서 양쪽 시험을 함께 준비해 놓은 기민성이 있는 사람만 가능한 일정이었는데 나는 어영부영하다가 원서도 제출하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나와 함께 해양대학에 응시했던 학생들 중에는 1차 시험에도 합격해 몇 명은 그쪽으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쪽으로 와서 내 동기생이 되었다. (당시에, 이 대학에 합격할 정도의 수준이면 다른 공과대학이나 의과대학 등 이과 출신들을 뽑는 대학들에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중으로 합격되는 게 상례였는데, 그 사람들은 두 군데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해서 입학을 하는 행운아가 되었다. 해양대에서도 빠져나가는 인원을 대비해서 예비 합격자를 뽑아 대기시켰다가 그 숫자만큼 추가 합격을 시켰다. 평년에는 전체 합격자의 절반이 등록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는데 그해에는 미등록자가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어영부영하다가 1차 시험 기회를 놓친 게 억울해서, 2차 시험에 응시해 장학금이라도 노려보려고 원서는 넣기는 했지만, 그때는 해양대학으로부터 가입학을 하고 내무 훈련에 들어오라는 소집 명령이 떨어져서 원서 접수 비용만 날렸다.
다른 대학들은 3월 초에 입학식을 하지만, 우리는 1월 중순부터 입교하여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해 낙오자가 나오거나 다른 대학의 1차 시험에 합격했던 사람들 중에 자퇴를 하고 빠져나가는 이들도 간혹 생겨서, 추추가로 합격증을 받고 훈련에 늦게 합류한 동기생도 더러 있었다.
해양대학은 이름만 대학이라 붙여 놓았을 뿐, 사관학교와 유사했다. 제복을 입고 외출(당시 우리는 상륙이라 했음)하면 그럴싸하게 보였지만, 학교 안에서는 군사훈련을 하고 기합 받고, 청소하여 점검받고, 틈만 생기면 잠을 자야 피곤이 풀리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의 연속이라 도무지 정 붙일 데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강의를 듣고 시험을 쳐야 했는데, 성적이 나쁘면 이유를 불문하고 퇴교를 시킨다고 겁을 줬다. 나는 문과 출신이라 이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빠진 곳이 많았음에도 운이 좋아 입학 성적은 좋았지만, 점수와 실력은 별개의 문제라 공과대학 공부의 주축인 자연과학 과목들은 강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배짱이었는지, 학교생활에서 자주 열외해 외출(상륙)을 할 수 있다는 꾐에 빠져 학보사 면접을 봤는데 문과 출신이라 똘똘해 보였던지 뽑혀서 기자가 되었고, 취재를 한답시고 밖으로 나돌다 보니 수업을 빠지기가 일쑤여서 자습할 시간마저 부족했다.
그러다 시험이 닥치면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로 암기 위주의 벼락공부로 버텼으니 성적이 좋을 까닭이 없었고, 학기말에는 학점이 많이 걸려 잘릴 뻔했는데, 입학 성적이 좋았고 학보사 활동을 열심히 하더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어 주신 교수님들이 몇 분 계셔서 재시험을 보는 대신에 퇴교만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교양과정으로 배우던 독일어는 비교적 문과와 가까운 과목이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우고 왔는데 나 혼자 처음이었던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는 뭣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문과는 프랑스어, 이과는 독일어를 채택하고 있었다. 대학에 진학해 보니 다른 학교도 비슷한 사정이었는지, 나만 독일어가 처음이었고, 다른 학생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독해나 작문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아베체데>부터 익혀야 했고 정관사를 외운다고 ‘데르 데스 뎀 덴..., 될 대로 되어라.’ 하고 있었으니, 진도를 따라잡기를 바란다거나 같은 문제지로 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그런데 실력이 월등한 학생들도 여럿이 재시험을 치는 와중에 의외로 나는 학점이 걸리지 않았다.)
예쁘게 봐주신 게 아니라 내 수준을 아시고 아예 포기해 버리셨는지도 모르지만, 교수님 덕분에 “Eile mit Weile(여유를 갖고 뛰어라).”는 생활의 지표가 되는 경구도 얻었고, 후일 독일인들과 함께 일할 때는 의사소통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인사라도 독일어로 나누게 해 주셨으니 당신께 받았던 수업들이 맨탕은 아니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런 상태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자각과 함께 오기도 생겨서 다음 학기에는 이를 악물고 노력했더니, 모든 과목이 더 이상 성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기는 했다. (가을에 유신 방학이 시작되어 겨울 방학 기간이 유난히 길었던 덕도 봤다. 독학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아무튼,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신을 차려 집중하고 정성을 다하면,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도 가능하게 변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이제부터는 학교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장담할 정도의 자신감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