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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푸른 시절 05화

4. 외할머니를 구출함

by 연후 할아버지

4. 외할머니를 구출함


외할머니께서 둘째 이모 댁으로 떠나신 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는 내가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대학에 재학하고 있었는데(당시 해양대학에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강제 입소였다.) 잰이모가 우리 학교의 정문 근처로 이사를 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에 인사차 찾아갔다가,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었다.


막내딸이 모처럼 갔더니, ‘심하게 아픈데도 노인은 의례 그런 거라며 병원에도 보내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하시더란다. 이빨도 온전치 못한 노인네에게는 드시기 편한 음식을 따로 마련해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고, 입고 계신 옷도 오래전부터 입던 그대로여서 거지가 따로 없더라며 잰이모는 자기 언니를 원망했다.


나는 잊고 지내던 분에 관한 얘기를 갑자기 들어서 당황했지만 처음에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이모가 몸을 떨며 울며 그치지 않으니 난감했다. 그 모습을 보다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시던 노친네를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팽개쳐 두고 살았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났고 마침내 이모를 부둥켜안고 함께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다.


둑을 무너뜨린 감정의 물살은 증폭 작용을 계속했다. 노후를 책임지겠다며 모시고 갔으면 그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감과 이제는 내가 컸으니 해결해야겠다는 의협심이 샘솟았지만,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학교에 다니고 있는 현실을 한탄하며 기회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시작하더라도 단시간에 해결하기는 어렵고 상당한 시일이 걸릴 문제라 방학 때나 되어야 가능할 것 같았는데, 여름에는 해병대 훈련 때문에 불가능하고 겨울까지 기다리려니 너무 멀어 화만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름부터 심상찮던 정국이, 가을에는 정부에서 10월 유신을 발표하자 더욱 소란해져서 급기야는 대학들의 방학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나의 계획은 몇 달 더 빨리 실행에 옮겨졌다.


학교에서 풀려나자마자 바로 둘째 이모 댁이 있다는 순천으로 달려갔는데, 할머니의 상태는 잰이모에게서 들었던 그대로였지만, 둘째 이모부와는 역시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소 하나를 받아 들고 서울로 올라가 그곳에 사는 그분의 자식(나의 이종사촌)둘을 불러 모아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들도 이미 내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듯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줬다.


그걸 받아 들고 부산에 있는 잰이모와 상의하러 갔지만, 그녀는 아이들은 많고 집은 좁은데 장사까지 하고 있어서 노인을 모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마침, 그 근처에 내 모친의 사촌 동생이 살고 있는데 하던 장사를 접은 후 어려운 처지래서 그를 만났다. 그때까지의 경과를 얘기하고 큰어머니(나의 외할머니)의 양자가 되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을 모실 의향이 있는지부터 먼저 타진했다.


그러고는 싶지만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좁대서, 돈을 보태 줄 테니 약간 더 큰 집을 얻으라 했더니, 잘 모신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외당숙이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기를 기다려 노인을 부산으로 모셔 왔다.


그로부터 몇 년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주말마다 나는 할머니를 뵐 수 있었고, 새로 양자가 된 외당숙이 배를 타고 싶대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부탁을 해서 선원으로 취직까지 시켜 줬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내 나이가 이십 대 초반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그런 강단과 추진력이 있었던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성취는 간절함에서 나온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인 듯하다.


다행히 외당숙 부부가 모두 어진 분들이어서, 외할머니께서는 그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다가 몇 년 후 평안히 세상을 떠나셨고, 그때 인연을 맺은 외당숙님은 그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보통 선원으로 승선하셨다.


서로 귀국 시기가 겹치면 안부 전화를 주고받기도 했고, 어려움에 봉착하면 즉각 연락을 주곤 하셨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그런 소식마저 끊긴 걸 보면 아무래도 지금은 그분도 세상을 하직하신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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