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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푸른 시절 06화

5. 산파 역할을 하며 목숨을 구해 준 아이

by 연후 할아버지

5. 산파 역할을 하며 목숨을 구해 준 아이


산모가 구정에 친정을 다녀가다가 생긴 사고였으니. 다른 해보다 일찍 시작되었던 긴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의 어느 날 오전 열 시쯤이었다. 등교일 가까워서, 고향집을 떠나 부산으로 돌아가려고 기차역을 항해 가던 중이었다,


집에서 역까지는 십 리 정도의 거리였지만 중간에 마을이 없었다. 간간히 진눈깨비를 실은 바람이 휘몰아쳐서 우산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반쯤 뛰어가면서도 입고 있던 제복이 젖을까 봐 신경이 쓰였던 기억이 난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젊은 부인 하나가 창백한 모습으로 길가의 잔디밭에 눈을 맞으며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냥 지나가려다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돌아섰더니, 가던 길이나 계속 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걸음을 멈추고 조금 더 지켜보니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는 애매한 신호로 변했다.


돌아서서 다가가며 살펴보니, 그녀의 주변에는 눈이 녹아 있었고, 마침 구름을 뚫고 고개를 내민 햇빛 사이로 안개가 미세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사고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 가까이 다가갔더니 피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슨 일입니까? 다쳤습니까?’ 물었더니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입술은 움직이며 뭐라고 하긴 했는데 알아듣지는 못했다.


바로 그때, 그녀가 가리고 있는 치마 밑에서 고양이 울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아하’하며 상황은 눈치 챘지만, 놀라고 당황해서 모든 의식이 일순간 정지하고 말았다.


추운 날씨에 아이가 이미 세상에 나왔으니, 머뭇거리다가는 생명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이 닥쳤는데,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되뇌어 봤지만, 그냥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사태를 해결할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하고, 주위에는 사용할 수 있는 도구나 수단이 전혀 없으며, 마을은 멀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뭔가를 하기는 해야 한다.


그 순간에, 서너 달 전에 밀양의 어느 산골에서 겪었던 유사한 사고와 그 동네 아낙네들의 잽싼 움직임과 주고받던 말들이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기억나기 시작했다.


주말에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가고 있는데, 산자락의 콩밭에서 밭을 매던 중년의 여인이 비명을 질러 대기에 사고라도 당했나 싶어 길을 돌아가 봤더니, 출산 전 진통이라고 했다.


다행히 집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교대로 부축해 가려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업으려 해보니 배가 짓눌려 아이가 다칠 것 같아 등산지팡이와 등산복 등을 이용해 들것을 만들어 눕혀서 태우고 갔다. 아직 여자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겐 가혹한 시련이었다. (남자를 모르는 상태로 잉태하신 성모님께서도 이처럼 당황하셨을 것이다.)


땀을 흘리며 고통을 참고 있는 산모를 달래며 집까지 운반해서 동네 여인네들에게 인계해 줬는데, ‘아이가 울지 않으면 거꾸로 쳐들어서 기도의 물을 빼 줘야 한다.’ ‘태는 두 군데를 단단히 묶은 후에 중간을 끊어야 한다.’ ‘따뜻한 물은 방에 가져 들어가되 아이는 목욕을 시키지 말고 수건으로 물을 적셔서 대강 닦은 후에 아랫목 따뜻한 곳에 눕혀 둬야 한다.’ 등등의 말들이 허공을 날아와서 내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아이가 이미 울음소리를 냈으니 거꾸로 쳐들 필요가 없고, 물수건이 아니어도 부드러운 천으로 닦으면 된다. 남은 일은 태를 묶고 자르는 건데, 그것도 실과 칼만 있으면 되고 감염이 되지 않게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가축이 새끼를 낳는 것을 여러 번 돕고 처리했던 경험이 있는데, 짐승과 사람이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 용기가 생겼고 침착한 상태가 되었다.


들고 가던 가방 속을 뒤져보니 연필 깎는 칼이 보여서 그걸로 외투 솔기를 따면 태를 묶을 실은 마련할 수 있고, 칼은 그 이후에 라이터 불로 소독하면 탯줄은 자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이 서자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체면 불구하고 여인의 치마를 들쳐서 산파 흉내를 내며 산모에게서 아이를 떼어내기 시작했고 일단은 성공했다.(보통 때였으면 의료법 위반이나 성추행으로 감옥 갈 일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산모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아이만 대강 닦아낸 후 내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싸안고는 최대한의 속도로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집에 가까워지자 고함을 쳐 내 부모님을 불렀고, 그분들께 아이를 인계한 후 리어카를 끌고 가서 산모를 태우고 왔다.


부산에는 하루 늦게 도착했지만 등교하는 데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하늘이 도왔는지 아이와 산모, 양쪽 모두 건강하게 조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내 부모님께서 산모의 회복을 위해 3주 동안 미역국을 끓여 주다가 마산에 있다는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나의 부친이 아이의 이름을 노현(路玹)이라 지어 줬다는 얘기도 덧붙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나와 인연을 맺었던 두 개의 이름 중의 하나다.


다른 하나는 원 씨 성을 가진 내 후배가 아이를 낳았대서 내가 <대로>라는 이름을 지어 줬는데, <박노현>과 <원대로>를 언젠가는 한 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잘 성장하고 자랐다면 지금은 50대 중반과 4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결혼 후, 내 아내가 아이를 여러 번 낳았지만, 집을 떠나 살아야 하는 직업 때문에, 나는 그 역사적 현장에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무책임한 남편이자 못난 아비였다. 운명이라 체념하고 살아야 하는 사내의 미래를 예견하고 불쌍히 여겨서 하늘이 미리 베풀어 준 선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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