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께서 미리 염려하시고 그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고 보통 사람들은 일생에 한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큰 데모를 나는 참 끈질기게도 이어오며 살았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각각 한두 번에 불과하던 것이, 제복을 입어서 실행이 불가능할 것 같던 대학 시절에는 더욱 잦고 횟수도 늘었다. 그중에서도 2학년 때의 집단 탈사는 단연 압권이었다. 1학년 때 무적 해병들에게 저항하여 거둔 빛나는 승리가 자존심과 자신감을 충만시켜 준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대학 2학년이 되자,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4학년 선배들과 부닥치게 되었다. 일종의 영역 다툼이었다. 당시의 후배들에게 4학년은 감히 마주 쳐다봐서도 그림자를 밟아서도 안 되는 절대 군주 같은 존재였는데, 우리는 그런 권위주의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 전통과 법칙을 시대의 흐름과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무시하고 파괴하려 했다. 선배들 입장에서는 이건 방자하고 무엄한 반역이요 쿠데타였으니 인정할 수도 없고 즉시 응징하고 싹을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도전이었다.
지난해에 해병대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반응이 와서 우리(2학년)는 집단 탈사를 단행했고 며칠 동안 귀교를 하지 않았다. 희희낙락하며 도망쳤지만 당황한 것은 4학년과 교수님들이었다. (최근에 나라를 불안에 떨게 했던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나 의대생들의 휴학 사태와 비슷한 일을, 민주화도 요원했고 군사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에 대책도 세우지 않고 무작정 결행했던 것이다.)
해양대학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천동지할 이 사건은, 시월 유신 이후에 처음 일어난 대규모 집단행동이었다는데, 독제 타도를 외치는 반정부 데모는 아니었지만, 이 일을 군부나 정부에서 알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가능성이 농후한 도박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떼를 지어 떠돌아다니다가 자금이 고갈되자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은신처에서 숨어 지내기 시작했는데, 사냥개의 코를 가진 선배들과 교수님들의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은 모두 잡혀 학교로 돌아왔다. 불안하고 견디기 어려웠던 우리가 일부러 흔적을 남겨서 스스로 체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단계는 주동자 색출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전체를 처벌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소수의 희생자가 필요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났던 나는 앞장서거나 선동하는 말과 행동은 피했으므로 주모자로 몰리지는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몇 명을 부르더니 관복과 관물을 반납하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학교를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말로만 들었던 귀가 조치를 당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다시 돌아와 복학을 할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고 했다.
사방을 들쑤셔 정보를 모아 봤더니, 정말로 주동을 했던 이XX가 나를 모함해 넣고 자신은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순가 4수 후 입학해서 나보다 두세 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학교를 잘리면 곤란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저만 빠지면 되지 왜 내가 주동했다고 고발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어리고 덩치가 작았으니 그의 눈에는 만만해 보였던 것 같다.)
교수님들도 결국은 나의 결백과 무고를 알게 되셨던지, <A급 과실자>라는 전과 기록만 남겨 두고 귀가 조치에서는 복귀시켜 주셨다. 내가 학교로 다시 돌아오자 이XX가 곤란해졌지만 그는 전혀 시침을 떼고 자신 있으면 붙어 보라는 듯 더욱 당당한 태도를 취했는데, 견딜 수 없이 얄미웠다.
그와 내가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그가 이기고 내가 진다. 그는 키가 나보다 한 뼘이나 큰 무술의 고단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멍청한 일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몽유병자처럼 그의 침대로 다가가서 담요로 그의 얼굴을 덮어놓고 엉덩이로 뭉개고 올라타서 밤새도록 두들겨 팼고, 다음날 아침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그를 보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난 후에도 나의 복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시한폭탄이라 불리는 미친놈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약간 지겹고 시들해질 무렵에, 내 부친께서 학교로 찾아오셔서 대뜸 질문하셨다.
“이XX을 아느냐?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되겠나?”
“어떻게 아셨어요?”
“이민 가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그의 부모가 나를 찾아왔다.”
“녀석이 눈치는 빠르고 목숨은 질기네요.”
그 회동이 있고나서부터는 나는 더 이상 녀석을 건드리지 않았다. 함께 졸업을 했고 세월은 흘러 우리도 이제는 늙은이가 되었는데, 아직도 그는 나와 마주치기를 거북해하고 피한다.
그가 용서를 구해서 화해를 여러 번 했고, 철부지 때 일은 제발 잊어 달라는 부탁을 나도 몇 번이나 했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원죄 의식은 끝날 줄 모르는 평행선이다. 이미 전생의 업보처럼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혀서, 우리 둘 중에 하나가 세상을 떠나야 풀 수 있는 매듭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