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때 선상 실습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4학년이 되고 1년을 더 학교생활을 해야 졸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학교 연습선(반도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해운회사들이 운항하는 상선으로 개별 실습을 나가기도 했는데, 그건 모두가 소망하던 일이었다.
개별 실습을 나가면, 학교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고,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인건비 대신에 <실습비>라는 걸 지급받으니 갈증을 느꼈던 용돈 부족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우리가 가장 선호했던 회사는 <S 항해>라는 유조선 회사였는데, 확인된 건 아니지만 당시 대통령의 개인 재산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던 그 회사 배들은 근무 환경이 좋고 실습비도 가장 많이 준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A급 과실자>였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일반사회에서 전과자가 되면 많은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A급 낙인은 졸업 때까지 따라다니며 모든 혜택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교무과에서 발표한 실습 지침에는, 선량한 학생들의 배정이 끝난 후에도 기회가 남아 있다면 과실자들의 차례도 고려해 보겠다고 되어 있긴 했지만, A급을 달고 개인실 습을 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대부분이 연습선에서 실습 기한을 채우는 게 관례였다.
그동안 공부는 열심히 해서 학업성적은 최상위 수준까지 올라갔는데, 마지막 줄에 병기된 과실점 부분에 막혀서 그때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풀이 죽어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기자 일을 하다가 인쇄소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교수실 여직원이 지나가다가 내 모습을 봤던 것 같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사정을 말했더니 걱정하지 말란다. 위로 삼아 던진 덕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에 모두가 원했던 <S 항해>의 실습생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고, 여직원들의 보이지 않는 힘의 무서움을 느꼈다. (그래서 후일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여직원들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고, 그녀들에게서 도움과 지원을 받으려고 항상 노력했다. 다른 동기생들은 내가 A급을 받은 줄 몰랐거나, 억울함이 있었으니 나중에 면제받은 줄 알았을 거다.)
서울 본사로 면접 보러 오래서 갔더니, ‘영어 회화는 조금 하느냐?’고 묻기에 ‘다른 학생들만큼은 합니다.’ 하고 대답했던 게 화근이었는지, 바로 며칠 후에 갑판부 실습생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트리니다드 앤 토바고>라는 나라로 날아가서 승선하라고 했다. (당시의 선원 과장은 선장 출신 선배였는데, 나중에 코미디언 이X재의 매니저 역할을 하시던 부친으로 더 알려졌던 분이셨다. 성질이 불같다는 예기는 들었지만, 영어 회화를 할 수 있다는 대답만 믿고 세상 물정 모르는 실습생들만 동승자도 없이 먼 나라로 비행기를 태워 보냈던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출발했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다섯 번인가 갈아탔다. 요즘에는 뉴욕으로 가는 직항 편이 많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 노선이지만, 그때는 그곳까지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김포에서 출발하여 하네다에 도착하니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태우더니,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거쳐 시애틀에 도착하니 뉴욕까지 가는 손님은 또 갈아타랬다.
서인도 제도의 섬나라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나라가 바뀔 때마다 비행기도 바뀌었고 스케줄도 자기들 맘대로 연기해서, 종착지 <포트 오브 스페인>에 도착해 보니 처음 계획보다 이틀이나 늦어졌는데, 대리점 얘기로는 우리가 승선하려던 배는 이미 출항해 버렸고 다음 입항 계획은 보름쯤 후라고 했다.
서울도 자주 가 본 적이 없는 촌놈들로서는 파김치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수긍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톰 소여의 모험>처럼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바, 카지노, 야외 수영장, 레스토랑까지 딸린, 별이 다섯 개나 그려진 호텔에 투숙했는데, 여관 밖에는 구경한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호화로운 궁궐처럼 여겨졌지만, 가진 돈이 없으니 앞쪽의 두 개는 그림의 떡이어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곧 시들해졌다.
레스토랑은 스테이크와 해산물이 번갈아 나와서 처음에는 먹을 만했다. 그런데, 김치와 고추장에 길들여진 입맛에는 맞지 않는 게 금방 드러났지만, 다른 식당을 찾아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언어 소통이 또 다른 문제였다. (호텔을 벗어나 시내에 나가보니 영어가 아니라 달나라 말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2주일을 계속 잠만 자며 기다릴 수 없어서 용기를 내어 조금 더 먼 곳으로 나가봤는데, 한글까지 곁들인 반가운 간판이 하나 눈에 띄었다. 태권도장이었다.
한민족의 위대함이여! 멀고 면 섬나라(당시까지는 영국 식민지)까지 와서 이렇게 뿌리를 내리다니.
허락도 받지 않고 무작정 문을 밀고 들어갔더니 한국인 사범이 현지인들에게 태극권 품새 동작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에는 나도 이 운동을 하다 출국했을 때라, 수련생 중 적당한 상대를 골라 대련을 붙여 달라고 청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관장과 금방 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가 사주는 한국 음식 비슷한 걸 먹었더니 생기도 되찾았다.
해양대학 실습생이라 했더니, 인접한 도시에 한국 어선 기지가 있더라고 알려줬다. 일반인들이 어선과 상선을 구별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 상황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의 차를 타고 그가 말하던 곳으로 달려갔다.
작은 배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중 한 척에 올라가서 일을 도와주며 며칠을 지냈는데, 고된 일과였지만 우리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을 만했고, 열흘 이상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우리가 실습 나온 게 어느 쪽이었는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승선을 해야 되니 호텔로 돌아오라.’는 대리점의 연락이 왔는데, 무시하고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작별 인사를 했더니, 그동안 정이 들었던지 어선 선원들이 섭섭해하며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을 모아 학비에 보태라며 주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김치 몇 쪽 얻어먹으러 갔다가 큰 횡재를 한 셈이다.
(그때 듣고 느끼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뱃사람은 그들이 본류다. 그분들이 작은 배를 타고 파도 속에서 사투를 벌일 때, 상선 선원들은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특수성은 있지만, 바다 위 대형 공장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평균 수입은 상선 쪽이 더 많다는 게 정설이지만, 고기를 잘 잡는 어선 선장의 경우는 상선 선기장보다도 몇 배를 더 많이 번다는 소문도 있었다. 상선에서는 고정 월급을 받지만, 원양어선은 보합제(어획량에 따라 선주와 선원이 미리 정한 요율에 따라 수익을 나누는 방법)라는 특이한 계약을 맺고 있어 고기만 많이 잡으면 무제한의 수입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은 배를 타고 있지만 선원들의 배포와 손이 커서 그때 내가 받은 용돈은 상선의 몇 달치 실습비보다 많았다.)
배정받은 유조선에 승선해 보니, 어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컸고 승무원의 숫자도 대단히 많았다. (요즘에는 비슷한 크기의 배도 22~23명이 정원이지만 그때는 60명도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 우리가 모셨던 선장/기관장님들의 연세를 역산해 보니 50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때 우리는 왜 그분들을 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선원들의 임금 수준, 특히 선기장의 월급 액수도 대단히 높았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선기장을 보며 선원들이 ‘저 영감, 오늘도 쌀 여덟 가마니 벌었다.’ 하고 수군대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