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기사(실습 기관사) 실항사(실습 항해사)로 불리던 우리들의 호칭과 신분은 애매한 존재였다. 그냥 실무에 참관하고 경험을 쌓으려 승선한 학생일 뿐이었지만, 유교적인 전통과 군대의 계급의식에 젖어 살던 우리는 그게 상당히 높은 직책인 줄 알았다.
곧 사관이 될 사람들이니 군대 계급으로 치면 준위와 같은 준사관의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고, 보통 선원들의 우두머리 갑판장이나 조기장은 상사 계급이니 우리보다 하위직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도 없고 웃기는 논리였지만 당시는 그런 게 통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기관실에 갔더니, 조기장이 나에게 업무 지시를 하며 일하는 태도에 대한 주의를 줬지만,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감히 누구에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 태도가 불량했는지 원래부터 성격이 급한 분이셨는지, 갑자기 육체적 공격을 가해 왔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 타고난 싸움꾼이요 씨름 선수의 아들이다. 슬쩍 발을 걸며 피했더니, 특별한 힘을 쓰지도 않았는데 그가 넘어졌고 약간 다쳤다. 요란했지만 짧은 해프닝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날 밤이었다. 침실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꿈인 듯 환시인 듯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푸른 옷을 입은 귀부인이 나를 부르며 손짓을 하는 게 자꾸 보였다. 나의 모친과 닮은 모습이었는데 복장과 풍기는 향기는 전혀 다른 분이셨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서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떠 보니,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 속에서 어떤 녀석이 내게 번쩍이는 식칼을 겨누고 서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이 요동쳤지만 정신을 차렸다는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린 나이에도 내가 상당히 침착했던 것 같다. ‘저 칼로 공격을 해오면 나는 어느 쪽을 내어 줘야 목숨을 지킬 수 있을까? 가슴이나 배보다는 왼쪽 팔정도를 다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유도하려면 누운 자세와 방향을 바꿔야 했는데, 잠꼬대를 하는 듯 표시 나지 않게 몸을 살짝 비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영겁의 세월로 느껴졌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옷이 젖고 매트가 축축해져서 불편했던 게 아니라 내 의도를 알아차릴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른 선원들이 몰려와 그를 방밖으로 떠밀고 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얼른 방문부터 잠그고 샤워를 대충 마친 후 기관실로 내려가, 그 녀석이 누구인지 물어봤더니 조기장의 아들인데 갑판부에서 세일러로 근무한다고 했다.
기관장님께서 부르셔서 올라갔더니 누가 보고를 했는지 모르지만 사태를 이미 알고 계셨고, 그들을 다음 항구에서 함께 하선시킬 테니 그때까지는 가능하면 마주치지 말고 피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다시 생각해 보니, 칼을 들고 방으로 침입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지만, 이해가 되는 점도 있었다. 자신의 연로한 부친이 어린애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니 분하기는 한데, 무술의 고수라고 소문난 놈과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관장님께 재고를 요청했다. 예측치 못한 사고였지만, 그 원인과 발단은 저에게도 있었으니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없었던 일로 처리하기로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소행을 반성했는지, 아니면, 또다시 사고를 칠까 봐 두려웠는지 차항에서 두 명 다 자원 하선하고 말았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사건을 회억하곤 한다. 당시에 나를 잠에서 깨운 여인은 성모님이었을까? 나의 모친이었을까? 그 부자는 그 후에도 승선 생활을 계속했을까? 재승선을 했더라도 서로 다른 배를 타고 함께 승선하는 건 피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