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초여름이었다. 방학은 했는데 귀가할 사이도 없이 (학점이 걸려 재시험을 치지 않았다면 며칠간의 휴가를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그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군복을 입고 해병대 훈련소에 입대하여 완전무장 상태로 구보하고 있는 군인들의 무리 속에 섞였다.
이 입대는 해군 장교로 만들기 위한 학군단 군사교육의 필수 과정이라 선택이 아닌 강제 동원이었다. 혹독한 훈련이라는 엄포를 수없이 듣고 가서 각오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실제는 소문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지독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해군 학군단에 소속된 다른 대학 학생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는데, 흥미로웠던 건 기합 받고 터지는 쪽은 우리 동기생들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대학에서 온 학생들이더라는 점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기숙사에 기거하며 내무생활과 군사훈련을 거치고 갔지만 그들은 처음인 것 같았는데 그 차이는 엄청났다. 학교에 있을 때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반복 훈련의 위력을 목격하고 확인한 것이다.
당시는 월남전이 한참일 때라 파병 갔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장교나 조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험한 욕을 입에 달고 살았고, 행동도 무척 거칠었다.
평소에도 우리를 유별나게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못살게 구는 장교 한 명이 있었다. 훈련 기간이 거의 끝나 갈 무렵에, 허기진 아이들이 밤중에 철조망을 뚫고 나가서 수박과 참외 서리를 해오다 하필이면 그에게 걸렸는데, 기회를 만난 그가 미친 듯이 날뛰기에 피하고 도망치다가 그의 몸에 상처를 약간 입혔던 것 같다.
어둠 속에서, 상대는 혼자인데 이쪽은 여럿이라 혼란 속에서 벌어진 돌발 사고였다. 평소에 미운털이 박혔던 사람이라 누군가 실수하는 척 밟아 버렸는지 그가 서두르다가 넘어진 것인지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모르지만, 큰 비명 소리는 그날 밤에 분명히 들었다.
어떻게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불안하긴 했지만, 월남전의 영웅이 설마 후보생들에 당했다고 광고하지는 못할 거라는 낙관론을 위안 삼으며 각자의 내무실로 돌아가 잤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보복은 다음날 아침에 바로 닥쳤다. 장교 몇 명이 몰려와서 범인을 색출한답시고 법석을 떨며 끝없이 기합을 주고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고백하는 순간에 몇 대 더 맞고 학군단에 연락하면 중징계를 면하지 못할 텐데, 자수해서 광명 찾겠다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지은 죄가 있어서 한동안은 모두 수용하고 견뎠지만,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계속 따르다가는 목숨이 위험하겠다는 두려움이 생길 때쯤,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사령관 면담을 요청한다.”라고 소리치자 모두 동조했고, 그때부터 우리는 모든 훈련을 거부했는데, 해병대 역사상 처음 발생한 초유의 항명 사태라고 했다.
독립투사라도 된 듯 큰소리는 치던 우리도 마음속으로는 겁이 났고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시일이 경과하자 훈련은 끝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귀가할 수 있었다. 덕분에 며칠 동안은 훈련도 기합도 없이 편하게 지냈다.
개인이 아닌 집단행동의 위력이었다. 그래서 노동쟁의나 파업을 하고 촛불 집회나 데모도 하는 것이리라. 법이나 공권력에 저항하는 일이니 모험이 따르겠지만 성공하고 난 뒤의 환희가 크고 불로소득으로 얻는 것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