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기간 3기사를 하다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회사에서 불러서 나갔더니 2기사 직책으로 출국 준비를 하란다. ‘진급하기에는 아직 빠르고 부족한 게 많습니다.’ 하고 사양을 했지만, ‘기관장님께서 함께 가는 조건이 아니면 자신도 승선하지 않으시겠다니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승진해서 출국했고, 당시는 승선 계약 기간이 대개 1년이었지만, 우리는 전선한 걸로 처리되어 2기사 생활 8개월 만에 연가(승선 계약 만료 후 휴가)를 받아 귀국했다.
공항에서 회사 직원이라는 분에게 수속 서류를 모두 맡기고 귀가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서류는 어떻게 하고 집으로 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상한 일이다 싶어 사방에 수소문해 봤더니, 다른 회사로부터 새치기를 당한 거란다. 면허장을 가진 해기사가 부족해서 자주 발생하는 해프닝이라 했다. 그제야 작년에 필기시험에 합격했을 때 승선 경력만 채우면 2급 면허는 자동 발급된다던 말이 기억났다.
하지만 이처럼 빠르게 1기사로 진급할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대명비(승선 전 대기하는 동안 받는 월급)까지 소급해 지급하고, 2기사 때보다 월급이 2배 이상 오른다는 것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지만, 동기들보다 빨리 진급해서 목이 빳빳해졌던 점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기사 1년을 하고 나서는, 1급 면허(당시에는 갑종기관장 면허라 불렀던 것 같다) 면접시험에 응시해 합격해서 당시까지는 최연소(25세) 1급 기관사 면허 소지자가 되었는데, 그때 취득한 면허장을 반세기 가까이 써먹고 있으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해서, 두 번째 1기사 때는 미국의 대형 유조선으로 옮겨 갔다. 그 배에는 1기사가 2명이 있었는데, 상급 면허장 소지 덕분이었을 테지만 나는 벌써 고참으로 인정받아서, 당직은 서지 않는 수리 전문(Day work) 1기사로 일하게 되었다.
(선원들은 그래야 빨리 진급한다며 <견습 기관장>이라 하기도 했지만, 나는 아직은 진급하려면 멀었고 기관장님께서 듣는다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했다.)
기관실에 내려가서 선원 명부를 봤더니 전체 선원 50여 명 중 기관부 선원은 절반쯤 되었는데, 그중에서 내 나이가 가장 어렸다. 나이와 지휘는 별개 문제다.
(세월이 지나면서 기관부 숫자만 자꾸 줄어 요즘에는 10명도 되지 않는 배가 대부분이지만, 당시에는 대부분의 수리를 본선에서 수행했으므로 기관부원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기관실에서 선원들과 함께 메인 엔진 피스톤 오버홀을 하고 있는데, 백인 1명이 슬리퍼를 신은 채 담배를 물고 기관실로 내려와 간섭을 하려 했다. 나는 그가 누군지도 몰라서 선원들에게 물어보니 이태리 출신의 본선 담당 공무 감독이라 했다.
그가 어떤 신분이든 상관없다. 이런 건방진 태도는 사람을 무시하는 나쁜 행동이다. 화가 나서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끄고 기관실에서 꺼지라고 호통을 쳤다.
그도 체구가 작은 동양인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빠르고 큰 소리로 뭐라고 지껄이는데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당신들 한국사람(You Korean)'이란 말은 똑똑히 들려서 ‘너희들 이탈리아 인들은 모두 마피아냐?(You, Italian, All Mapia?)'라고 맞대응하다가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기관실 밖으로 밀쳐 냈더니, 그는 선실로 올라가 급히 가방을 챙기고 도망치듯 배에서 떠나 버렸다.
며칠 후, 회사에서 전화로 이 사건에 대해서 묻기에 있었던 그대로 대답하며 하선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다음 항차에 미국에 입항해 보니 나에게는 특별한 지시가 없었고 그가 회사에서 잘려 자기 나라(이탈리아)로 귀국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회사에서 나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기관장님께 나의 해기 면허와 신상에 관해 묻더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평온한 날이 지속되어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모시고 있던 기관장님께서 휴가를 가시게 되었다.
기관실에서 일하고 있는 나를 갑자기 집무실로 부르시더니 뜬금없이 맹세를 하라고 하셨다. 내용은 들어봐야겠다 싶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본선 진급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 회사에서는 나보다 5~6년 선배들도 진급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태반이어서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말씀하신다. 시카고 본사에서 자기에게 추천서를 써 보내라는 연락이 왔는데 그전에 맹세를 받아야겠단다.
“진급은 먼 훗날 일이라 아직은 기대도 않고 있습니다. 어른의 명은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지 따르겠지만, 내용이라도 알아야 그 맹세란 걸 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닙니까?”
“특별한 건 아니야. 두 가지만 약속하면 돼, 기관장 하는 동안 아침 식사는 거르지 않겠다는 것과 어떤 경우라도 아침 미팅에는 참석하겠다는 간단한 거야.”
가슴이 뜨끔 했다. 당시에는 선내 회식이 잦고 술을 많이 마실 때라 늦게 기상하는 걸 보셨던 것 같다. 죄송한 생각이 들어 사과를 드렸더니, 성경을 들고 나와 그 위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하란다. 인간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은 죄가 있고 크게 손해 날 일도 없어서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통상적으로는 추천서가 서너 번 올라가야 진급 심사 대상자가 된다던데, 이번에는 인수인계를 하라는 명령과 함께 임명장이 바로 내려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능력 있는 1항기사들이 모두 회사를 떠나서 회사에서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인사 적체 때문이라, 파격적인 진급 기회를 벼루고 있었더란다.
아무튼 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서 세계 최고 월급을 준다던 그 회사뿐만이 아니라 한국 전체에서도 최연소 대형 유조선의 기관장이 되었다. (내 동기생들의 대부분이 2항기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중간에 배를 내려 육상 근무를 하다가 승선했던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면허장을 쓰고 있으니 동일한 해기면허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용했던 선박 기관장으로 기네스북에 등재할 일이 아닌가 싶다.
해양대학은 젊은이들을 뽑고 교육시켜 한국 선원들의 명성과 기술 수준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서도 나처럼 오랫동안 승선한 졸업생이 있다는 건 투자에 비해 수지맞는 장사를 한 셈이다.
(여담이지만, 동기생 중에서 최초로 선장 진급을 했다는 걸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친구도 그때는 2항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 배로 방선했다가 내 직책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바로 귀국해서 2급 면허를 따서 1항사로 나갔고, 작은 배 선장이 된 것은 3년인가 지난 후의 일로 기억된다. 나는 기관장이라 선장이 아니므로, 동기생 중에서 선장은 자기가 가장 먼저 되었다는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내 앞에서는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나는 후진들에게 자주 말한다. 조직에 속한 사람이 남의 눈에 차려면, 열심히 하는 것을 넘어서 상대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를 홀려서 반하게 만들어야 된다. 그렇게 되려면 특별한 기회를 만나거나 약간의 기획력을 동원한 이벤트가 필요하다. 행운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만 따라온다.
(노력과 운이 함께해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빠른 진급이 내 인생에 도움을 줬는지 독이 되었는지는 따져 봐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진급 직전에 기관장님께서 내게 시킨 맹세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오랜 승선 생활에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