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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본 가톨릭 신앙

by 연후 할아버지

3. 신앙에 대하여


승선 중에 금기로 여기는 대화가 몇 가지 있다. 한국인들끼리 승선할 때는 그중에 첫 번째가 정치고, 종교는 두 번째인 반면, 다국적 선원일 경우는 종교적 논쟁이 첫 번째고 외모 피부색 등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두 번째다.


종교는 어느 나라 선원과 함께하든 단골로 해당되니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나의 신앙을 권하거나 타인의 종교를 비판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자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오래 함께 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종교를 믿고 있는지 정도는 자연스럽게 서로 알게 되니, 신앙인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말없이 실천하여 존경을 받는 게 가장 좋은 포교 활동이다.


필리핀,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갈 등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 중남미는 대개 가톨릭 국가이므로 이런 나라들에 입항했을 때, 혹은 다른 나라라도 대리점에게 물어 성당이 있다는 항구에서는, 나는 억지로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미사에 참석해 보려고 노력한다.


1) 내가 본 가톨릭 신앙


동독의 <로스톡>항에 입항했는데, 은행과 블랙마켓의 환율이 열 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극심했다.(동독은 오래전에 서독과 통일해서 지금은 독일로 통칭되지만, 당시에는 공산당이 지배하던 분리된 나라였으니 그때 부르던 이름을 써 봤다.)


동승하던 선장은 영국인이었는데,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부식을 공급받으면 선원들을 굶길 것 같다고 걱정해서, 내가 시내에 나가 구입해 보겠다고 자청했다.


그런데 <달러>를 숨겨 가지고 나가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세관 박스는 무사히 통과해서 안심을 했더니, 시내로 나가는 기차에서 조리장이 앉았던 자리에 돈이 든 가방을 놓고 내려 버렸다. 소탐대실이라더니 재주를 부려 이익을 보려다가 된통 당한 것이다.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난감했지만, 선원들을 굶길 수는 없다는 절박감이 엄습해, 역 사무실에 돈 얘기는 빼고 가방만 분실 신고를 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경찰이나 세관이 아니니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세 시간 가까이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어떤 아가씨가 그 가방을 주웠다는 것이다. 주소를 받아 들고 물어 가며 찾아갔더니, 아주 낡고 작은 아파트였다.


허락을 받고 들어갔는데, 방과 거실의 구별도 없는 실내에는 좁은 소파 하나와 탁자가 전부인 가난한 살림이었다. 잃어버렸던 가방을 주기에 돈부터 세어 봤더니 한 푼의 어긋남도 없었다.


약간이라도 보상금으로 주려 했더니 계속 사양하였다. 그리고 이 실랑이가 길어지니 화를 내며 성모상을 보여줬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종교를 허락하는가 싶어서 물어보니, 사제가 없어서 미사는 볼 수 없지만 오래된 신자라 기도는 매일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사제 없이 신자들 만으로 신앙을 지켰던 역사가 있다며 그녀에게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하고는 함께 기도를 드리고 나왔다.


배로 돌아와서는 내가 갖고 있던 성물들과 필리핀 선원들의 영어로 쓰인 성경을 있는 대로 합해서 그녀에게 보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의 한 명이다.


또 칠레의 <안토파가스타>라는 항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대리점에 성당의 위치와 미사 시간을 물었더니, 성당 가는 길은 안내해 주면서 미사 시간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당신은 신자가 아니요?’ 하고 물어봤지만, 신자이기는 한데 미사는 사제의 사정에 맞춰 드리는 것이고 자신은 신부님이 아니니, 그분 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답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출발해서 도중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도 비슷한 대답이다. <깜빠라(종이 울린다는 뜻의 스페인어)>를 들으면 그때 준비해도 늦지 않단다. ‘학교 종이 땡땡땡’이 아니라 ‘미사 시작은 신부님 맘대로’였다.


성당에 도착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아무리 순명을 강요하는 종교라지만, 예약과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항명이 빗발치든가 많은 신자들이 다른 종교로 옮겨가 버릴 확률이 높다. 나는 그들의 느긋하고 평화로운 모습에서 마음의 파동을 느꼈다. 신앙이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모습이라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들과 미술품들을 보면 인류 역사와 예술은 종교와 분리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가톨릭으로 옮겨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그날 칠레에서 받았던 잔잔한 감동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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