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먹자, 이 약.

by 오후 네시

어느 평범한 가을날, 초가을은 아니었기에 날씨가 꽤 쌀쌀해지던 시점이었다. 매일 차를 끌고 출퇴근을 하던 내가 애마를 집에 두고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결코 자발적인 일은 아니었다. 대중교통이 잘 돼있지 않은 지역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내 기준에서) 무려 편도 1시간 10분은 족히 걸리는 루트였다. 지금은 출근 시간이 8시 정도로 많이 늦춰졌지만, 그 때만 해도 7시 출근이 보통이었던 터라 아침에 일어나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던 시기였다.


입사한 지 5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나는 일주일에 운동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반복적인 업무를 하던 전형적인 샐러리맨이었다. 거기다 주 1-2회 음주는 기본, 잠도 불규칙하게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요즘 직장인들의 패턴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 크게 다르진 않을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지루한 루틴을 반복하던 나는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없고 쉽게 피로해졌다. 나중에야 그게 건강에 적신호를 보내는 거라 알았지만, 처음엔 피로감이 몰려오니 '운동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차를 집에 두고 걸어다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른 출근시간과 먼 출근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됐다. 걱정했던 것보단 할 만 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조금 잘 수 있었기에 나름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자는 게 즐거움이었다니..). 워낙 운동을 안했던 시기라 걷기만 해도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게 몇주를 지냈을까, 어느 덧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됐다. 나는 이렇게 매일 걷다 보면 조금씩 상태가 좋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기는 커녕 더 악화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무릎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걸 느껴본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단순히 운동부족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미련했던 나는 우선 버티고 계속 걸어다녔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한 달이면 충분했다.


겨울이 되면 은행은 히터를 빵빵하게 튼다.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을 수 있는 피서지가 되듯, 겨울에도 나름 안식처가 되어준다. 원체 열이 없어서 겨울마다 추위와 싸우던 나였기에 히터는 곧 '사랑'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해 초겨울에 나는 몸에서 열이 올라 자꾸만 히터를 껐다. 동료들은 당연히 추웠을테니,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양해를 구하며 히터를 끌 때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커피를 좋아하기에 하루 1잔은 거의 꼭 마셨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두 세 잔을 마신 것도 아니고, 그냥 한 잔일 뿐인데 말이다. 업무 처리를 다 해드리고 손님에게 통장을 건네주는데, 손이 떨렸다.


'이건 또 뭐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손이 떨린다는 걸 인지하기 전까지만 해도 불규칙적이던 화장실 패턴이 항상 불만이었던 내가, 매일 쾌변을 하는 이상한(?) 현상 덕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요즘 걸어다녀서 그런가?'하며 좋아했으나,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건강에 뭔가 이상신호가 있음을 느꼈다(너무 둔한건가 싶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은행원도 평일에는 개인 업무를 보기가 어렵지만, 다행히 지점과 같은 건물에 내과가 있어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에 다녀왔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좀 해보았는데, '당뇨' 아니면 '갑상선질환'이 의심돼보였다. 그래서 피 검사를 요청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이 복잡미묘했다.


사실, 이렇게 되기 몇달 전쯤 나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었고 이미 내과와 대학병원의 신경정신과 진료까지 받은 상태였다. 뇌 CT까지 찍었는데 혈관 등에는 이상이 전혀 없으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그게 가능?) 혹여 목 디스크가 생기면 그럴 수 있으니 관리 잘하라는 식이었다. 목 관절에도 이상은 없었다. 그럼 대체 뭐가 원인이었나 싶다.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 그거 하나면 모든 증상이 설명돼버리는 슬픈 현실. 어쨌든 두통의 빈도가 좀 잦아들어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와중에 또 병원에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틀 뒤에 나온 결과는..


갑상선 항진증 : 갑상선항진증은 갑상선에서 과잉 생산된 갑상선호르몬이 혈액 내에서 증가되어 갑상선의 생리적 작용이 과도하게 나타나는 임상증후군입니다. (출처: 국가건강정보포털 의학정보)
증상: 식욕이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체중이 감소할 수 있다. 더위를 참지 못하고 맥박이 빨라지며(빈맥), 두근거림, 손 떨림이 나타나거나 대변 횟수가 증가할 수 있다. 피로감, 불안감 및 초초함이 나타날 수 있고, 가슴이 아프다고 느끼거나 숨이 차다고 느낄 수 있다. 근력 약화로 인한 근육 마비가 올 수 있다. 눈이 튀어나오거나 안구 건조증 및 각막염, 복시(사물이 겹쳐 보임)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그레이브스 안병증(Graves' ophthalmopathy)이라고 한다. 또한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심하여 사망에 이르게 될 경우 이를 갑상선 기능 항진증의 발작 또는 급성발작이라고 한다. (출처: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서운 질환이었다.


예상했던 거지만, 검색으로 얻어낸 얄팍한 지식이 다였다. 의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남성이 걸리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그것도 30대 남성이.. 난 도대체 뭘 한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걸리는 원인 또한 스트레스 아니면 유전이라고 했다. 가족들 중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없다고 하니, 역시나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하하.. 전생에 스트레스랑 원수 졌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던 보직에서 벗어나 다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었던 시기라 내 병이 악화되는 걸 조금은 방지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병을 진단받은 직후에 일반 지점을 벗어나 '해외 파견 근무'를 3개월간 떠나게 될 예정이었다. 그 파견 근무 자체가 일종의 포상 형식이라, 나는 한국 내 은행에서의 '열악한 환경'을 벗어나 여유로운 해외 근무지에서 3개월간 몸조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받은 셈이었다. 이건 마치, 신이 나에게 병 주고 약 주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짜놓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신의 선물을 받은 나는, 약 1년 정도 호르몬 약을 먹으면서 식이조절을 했다. 운동도 간헐적으로 했고(항진증일 때 운동은 최소화 해야 한다) 술도 끊고 절제된 삶을 살았더니 금방 호전될 수 있었다. 간혹 심한 사람들은 완치가 되지 않아 평생 약을 먹는다든가, 갑상선을 일부 잘라내는 경우도 생긴다는데 정말 다행히도 나는 완치가 되었다(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인생에서 호르몬 약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렇게 1년 여간의 동행 끝에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났다. 건강, 잃기 전에 지켜야 한다는 말은 정말 진리이다. 물론 잃기 전에 그 소중함을 알기란 정말 쉽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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