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아빠는 왜 없어?"에 노는 것으로 답했다

박물관에서 미술관까지, 노는게 남는거다.

by Reich 라이히

"엄마, 우리 아빠는 왜 없어?" 다섯 살 아들의 벼락같은 질문은, 수천억 원짜리 계약서의 오타 하나까지 잡아내던 저의 날카로운 이성을 단숨에 무력화시켰습니다.


비즈니스 정글에서 수많은 난관을 뚫고, 여성으로 지사장 자리에 올랐지만, 아이의 이 투명한 질문 앞에서는 18년 관록의 리더십도 아무런 쓸모가 없더군요. 정답이 명확한 비즈니스 세계와 달리, 사랑하는 내 아이의 상실감에는 어떤 '정답'을 내놓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슬픔' 대신 운동화 끈을 묶기로 결심했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빠라는 빈자리를, 아이의 기억 속에 '엄마와 함께한 뜨거운 주말들'로 꽉 채워주겠노라고 스스로와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지사장 엄마의 지독하고도 간절한 '박물관 사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평일 내내 독일 본사와 시차를 넘나들며 치열하게 일하는 워킹맘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저녁 한 끼 같이 먹기 힘든 날이 부지기수였죠. 마음 한구석엔 늘 미안함이 돌덩이처럼 얹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미안함에 매몰되는 대신, 저만의 '철저한 보상 원칙'을 세웠습니다. 바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주말중 하루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는 날"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서울 시내 박물관 지도를 다 외우던 시절


토요일 아침이 밝으면 저는 다시 '현장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미술관,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아쿠아리움... 서울과 수도권 인근, 전국 어디든 아이들과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었습니다


독일 유치원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하며 세상을 온몸으로 만끽하던 그 습관을 한국에서도 이어가고 싶었거든요.


미국 교육학의 거장 존 듀이는 '행함으로써 배운다(Learning by Doing)'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구경하는 장소가 아니었으며, 엄마의 손을 잡고 낯선 길을 걷고, 리플렛의 그림과 눈앞의 형상을 대조하며, 삐뚤빼뚤한 글씨로 자신의 하루를 정의하던, 그 모든 '경험'이 아이에게는 곧 살아 있는 '공부' 였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신나게 놀고,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 다니는 게 공부보다 중요하단다."

이 믿음 하나로 토요일 만큼은 학습지 대신 운동화를, 문제집 대신 도시락을 챙겼습니다. 박물관의 차가운 돌벽을 만져보고, 식물원의 낯선 꽃향기를 맡으며 아이들의 오감은 깨어났습니다. "이건 시험에 나오니까 외워야 해"라는 강요 대신, "세상은 이렇게 넓고 신기한 게 많단다"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노는 시간'이 어떻게 '공부 근육'이 되었나


어떤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남들은 주말에도 학원 뺑뺑이 돌리는데, 그렇게 놀러만 다녀도 괜찮겠어요?"


제 대답은 확고했습니다. 초등교육의 시간들은 아이들이 나중에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만났을 때,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연료'를 채워주는 시간이라고 믿었으니까요.


실제로 초등 시절 마음껏 뛰어놀며 세상을 탐색해본 아이들은 호기심의 수준이 달랐습니다. 훗날 중·고등학생이 되어 교과서에서 박물관에서 봤던 유물을 발견하고, 식물원에서 직접 봤던 식물의 생리를 배울 때 아이들의 눈빛은 반짝였습니다.


지식은 머리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리는 '체득'의 영역임을 아이들은 스스로 증명해냈습니다


엄마는 가장, 너희는 학생.

저는 아이들에게 늘 솔직 하려 노력했습니다.


"엄마는 이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주중엔 회사 일에 최선을 다할게. 대신 토요일은 온전히 너희와 함께할 거야. 너희도 학생으로서 학교 시간을 멋지게 즐겨주렴."


이 단단한 팀워크 덕분에 아이들은 엄마의 부재를 서운해하기보다, 토요일의 모험을 기다리는 건강한 아이들로 자랐습니다.


지금 일과 육아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워킹맘이 계신다면,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평일의 미안함을 주말의 '학원 라이딩'으로 갚으려 하지 마세요.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보셔요. 함께 세상을 구경하며 쌓은 그 '기억의 자산'이 훗날 아이가 입시의 파도를 넘게 할 가장 큰 힘이 될 거라 믿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거창한 계획이 없어도 좋습니다. 아주 작은 공원이라도 아이와 함께 떠나보세요.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의 경이로움을 함께 발견하는 그 1시간이, 훗날 어떤 고액 과외보다 강력한 아이의 자존감이 될 것입니다.

​저의 이 지독하고 간절했던 기록들이 여러분의 모험에 '작은 지도(a small map)'가 되길 바랍니다. 저의 다음 여정이 궁금하시다면, [구독]으로 따뜻한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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