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이시돌 혹은 구두 신은 사내
퇴비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한 이후, 한림의 시간은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리듬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같은 곡만 연주하던 낡은 오르골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태엽을 감아 이전과는 다른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던 서툰 망치 소리는 잦아들었고, 그 자리를 김만수가 끄는 손수레의 규칙적인 삐걱임과, 퇴비 더미를 뒤집는 쇠스랑 소리가 채웠다. 마을을 괴롭하던 악취는 비 온 뒤의 숲속에서 나는 것과 같은, 깊고 향긋한 흙냄새로 변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돼지의 똥을 부정한 오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내년의 보리 수확을 기대하게 하는 ‘검은 황금’이 되어 있었다.
임피제의 시스템은 완벽한 순환 구조를 갖춘 것처럼 보였다. 돼지는 사람들의 희망을 먹고 자랐고, 그 돼지가 남긴 배설물은 다시 땅을 살리는 거름이 되었다. 그 순환의 과정에서 절망에 빠졌던 한 인간(김만수)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고, 말을 잃었던 한 아이(영호)는 자신의 역할을 찾아 어른이 되어갔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마치 잘 조율된 오케스트라처럼, 각자의 파트를 연주하며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임피제 신부는 그 평화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땅을 파고 돌을 깨던 때의 육체적인 고단함과는 다른, 훨씬 더 무겁고 끈질긴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낡은 단파 라디오의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마치 우주 공간의 별들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방 안을 채웠다. 그는 다이얼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여, 잡음과 잡음 사이, 아주 좁은 틈새에 존재하는 어떤 신호를 찾으려 애썼다. 마침내, 잡음의 바다 저편에서, 희미하게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화음, 툭툭 끊어지는 멜로디. 델로니어스 몽크의 연주였다. 그 음악은 이 섬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질서를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모든 시스템은, 그것이 완벽하게 작동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고. 혹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그의 시선은 그러나, 그 순환의 고리 너머, 더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마을 아이들이 이전보다 더 나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들의 눈빛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허기를 읽었다. 그것은 배고픔의 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세상에 대한 허기였다. 소년들은 감자를 키우는 법을 배웠지만, 그 감자를 팔아 살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읍내 장터의 고무신이 전부였다. 그들의 세계는 여전히 이 섬 안에 갇혀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강매실의 아들 영호가 낡은 잡지 한 권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듯한, 빛바랜 라이프(LIFE) 지였다. 잡지에는 높다란 빌딩과, 불빛으로 가득 찬 도시의 밤 풍경이 담겨 있었다. 영호는 그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사진 너머, 자신이 가보지 못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임피제는 깨달았다. 자신이 만든 시스템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냈지만, 그들의 꿈까지 키워주지는 못했다는 것을. 돼지와 퇴비는 생존의 문제였지만, 성장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섬을 외부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더 높은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이 섬의 아이들이, 굳이 육지로 떠나지 않고도 더 넓은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줄 무언가. 그의 시선이 퇴비 공장 너머, 가시덤불과 날카로운 돌멩이만 무성한 드넓은 황무지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 땅을 ‘이시돌’이라고 불렀다. 농부의 수호성인인 성 이시도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지만, 그 이름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버려진 땅이었다.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 척박했고, 나무를 키우기에는 바람이 너무 거셌다. 그곳은 수백 년 동안, 그저 섬의 일부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잊힌 공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돼지의 꿀꿀거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유가 금속 통에 부딪히는 청량한 소리, 냉각기가 돌아가는 기계음, 그리고 아이들이 하얀 우유를 마시며 웃는 소리였다. 우유. 그것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공과 유통이라는, 더 복잡하고 현대적인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상품이었다. 그것은 이 섬을 자급자족의 작은 왕국에서, 외부 세계와 교류하는 경제 주체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의 액체와도 같았다. 저 이시돌의 황무지를 푸른 초지로 바꾸고, 그 위에 젖소 떼를 키울 수만 있다면.
그것은 돼지 몇 마리를 키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새로운 시스템이 설계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초지, 젖소, 착유, 우유 가공, 그리고 배급.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자, 이 섬의 미래를 통째로 바꾸어 놓을 혁명이 될 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장 어려운 퍼즐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니까.
다음 날 아침, 그는 손수레 대신 낡은 곡괭이 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이시돌 황무지였다. 그는 황무지의 한가운데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거친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땅을 향해 곡괭이를 내리찍었다. ‘쨍’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곡괭이는 단단한 화산암에 부딪혀 불꽃을 튀기며 튕겨져 나왔다. 그의 손바닥으로 찌르르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의 기이한 노동은 그렇게, 또다시 시작되었다.
소문은 다시 마을에 퍼져나갔다. 코쟁이 신부가 이번에는 버려진 땅에서 돌을 깨고 있다는 이야기. 사람들은 이제 그를 미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저 이방인의 집요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김만수와 영호를 시작으로, 마을의 남자들이 하나둘씩 낡은 농기구를 들고 이시돌 황무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부의 꿈을 이해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짓누르던 무기력과 체념의 돌멩이 하나라도 깨부수고 싶어서 그곳에 왔다. ‘쨍. 쨍, 쨍.’ 황무지에 울려 퍼지는 곡괭이 소리는 더 이상 한 이방인의 기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멈춰 있던 섬이 다시 심장 박동을 시작하는, 장엄한 합주곡과 같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새로운 희망의 궤도 위로 오르는 것처럼 보이던 1958년의 늦여름이었다. 그날 오후의 공기는 미지근한 물처럼 평화로웠고, 하늘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듯, 지루할 정도로 파랗기만 했다. 위기는 언제나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법이라는 사실을,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건의 시작은 소리가 아닌, 어떤 이질적인 풍경의 등장이었다. 마을의 좁고 먼지 나는 흙길 위로, 검고 반짝이는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차는 마치, 섬의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미래에서 온, 정체불명의 기계처럼 보였다. 차체는 매끄러웠고,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이시돌 언덕에서 돌을 깨던 남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은 겁을 먹고 돌담 뒤로 숨었고, 여자들은 우물가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차가 멈춰 서자, 운전석에서 내린 말쑥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이 섬의 풍경과는 단 한 조각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짙은 감색 양복은 한 치의 구김도 없었고, 손목에는 금빛 시계가 번쩍였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발에 신겨진 검은 구두는 길바닥의 흙먼지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듯, 오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육지, 그것도 부산에서 큰 사업을 한다는 최 사장이었다. 그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돈의 흐름을 읽는 법을 터득한 남자였다. 그의 눈에, 제주의 가난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저개발된 시장’이자 ‘저렴한 기회’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최근 제주를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한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소문을 전해 들었다. 푸른 눈의 신부가 돼지를 공짜로 나눠주고, 그 돼지 똥으로 땅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이야기.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그저 흥미로운 가십으로 넘겼지만, 최 사장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그는 ‘기적’이라는 단어 속에서 ‘사업 기회’라는 단어를 정확히 포착해냈다.
최 사장은 마을 원로들이나 유지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곧장, 퇴비 더미가 산처럼 쌓여있는 공터로 향했다. 그는 퇴비 더미 앞에서 일하고 있던 김만수에게 다가가,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치 값을 매기는 듯한 투로 물었다.
“이것이 그 소문의 퇴비라는 것이오?”
그는 퇴비를 한 줌 집어 드는 대신, 하얀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이 땅과 노동에 대한 그의 모든 태도가 담겨 있었다. 김만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수고가 많소. 이런 궂은일을 하다니.” 최 사장은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꺼내 김만수에게 건네려 했다. “이걸로 막걸리나 한잔하시오.”
김만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제 일의 대가를 신부님께 받고 있습니다.”
그의 거절에 최 사장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그는 곧장 임피제의 거처를 찾았다. 그는 임피제의 좁고 소박한 사무실을, 마치 값싼 여인숙 방을 둘러보는 사람처럼, 경멸의 기색을 숨기지 않고 둘러보았다.
“신부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셨더군요.”
최 사장은 스스로를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은 부드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단단했다. 임피제는 끓인 보리차를 내왔지만, 최 사장은 정중히 사양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이런 훌륭한 ‘자선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내실 줄이야. 존경스럽습니다.” 그는 ‘자선 사업’이라는 단어에 미세한 조롱의 뉘앙스를 실었다.
임피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낯선 방문자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마치 오래전부터 예견했던 어떤 현상을 마주한 과학자의 그것과 같은, 깊은 관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신부님.” 최 사장이 본론을 꺼냈다. “자선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끝낼 수 없습니다. 가난은 ‘사업’으로 끝내야 하는 겁니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말이죠.”
그는 가방에서 번지르르한 가죽 표지의 서류철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그것은 ‘한림 농산 개발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사업 계획서였다. 내용은 간단하고, 명쾌했으며, 그리고 치명적이었다. 마을의 모든 돼지를, 현재 시세보다 1할이나 높은 값에 전량 현금으로 사들인다. 그리고 이 마을에, 제주도에서 가장 큰 현대식 축사와 도축 시설을 짓는다. 퇴비는 자신이 직접 육지의 대형 비료 공장과 독점 계약해 전량 수매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새로운 공장의 직원이 되어 안정적인 ‘월급’을 받게 될 것이다.
“신부님의 ‘돼지 은행’은 훌륭한 이상이지만,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입니다. 사람들은 새끼 돼지를 기다리는 대신,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현금을 원합니다. 땀과 기다림이 아닌, 돈으로 말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현실을 선물하겠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반박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그것은 임피제가 수년에 걸쳐 씨앗을 심고, 물을 주어 겨우 싹을 틔운 ‘신뢰와 순환의 공동체’라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고 그 자리에 번쩍이는 플라스틱 조화(造花)를 심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임피제는 계획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최 사장님. 저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찾고, 그 길의 주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인이라…”
최 사장은 마치 어린아이의 순진한 꿈을 듣는 어른처럼, 선심 쓰듯 미소 지었다.
“신부님, 굶주린 사람에게는 주인의 자존심보다, 당장의 쌀 한 가마니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더 쉬운 길을 택하게 되어 있지요.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최 사장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값비싼 양복의 나프탈렌 냄새와 돈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임피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최 사장의 검은 승용차가, 마치 갯벌 위에 나타난 상어의 등지느러미처럼, 마을의 흙길을 유유히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날 이후, 최 사장은 마을에 머물며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는 돈이 급한 사람에게는 인심 좋게 돈을 빌려주었고, 아직 돼지를 분양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미래를 약속했다. 그는 이시돌 언덕에서 힘들게 돌을 깨는 남자들에게 다가가, 시원한 막걸리를 사주며 말했다.
“이보시오들. 언제까지 저 코쟁이 신부 밑에서 공짜로 돌이나 깨고 있을 거요? 내가 축사를 지으면, 당신들은 이런 궂은일 대신, 따뜻한 실내에서 편하게 일하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게 될 거요. 자식들 학교도 보내고, 명절에는 고기도 실컷 먹을 수 있단 말이오.”
그의 말은 달콤한 독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특히, 아직 돼지를 분양받지 못했거나, 임피제의 시스템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마을은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임피제가 약속한 ‘느리고 불확실한 자립’과, 최 사장이 약속한 ‘빠르고 확실한 예속’.
강매실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최 사장의 눈빛에서, 오래전 자신을 괴롭혔던 가난의 냄새와 똑같은, 하지만 훨씬 더 세련되고 위험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저 구두를 신은 사내는, 돼지를 사러 온 것이 아니라고. 그는 이 마을이 애써 되찾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사냥하러 온 것이라고.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임피제를 찾아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불안이 서려 있었다.
“신부님.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임피제는 그녀에게 따뜻한 보리차를 내주며, 조용히 말했다. “알고 있소, 매실 씨.”
“막아야 합니다. 저 사람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아니오.” 임피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 아이가 스스로 걷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수없이 넘어지고 깨지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오. 나는 그저, 그들이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줄 뿐이오.”
그의 말은 너무나 무책임하게 들렸지만, 강매실은 그 말의 진짜 무게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신의 방식이라기보다는, 가장 고독하고 위험한 창업가의 방식이었다.
마을의 분열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시돌 언덕에서 함께 돌을 깨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최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했고, 어떤 이는 신부님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망치 소리는 더 이상 희망의 합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열과 갈등의 불협화음이 되어, 위태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 최 사장은 마을의 가장 넓은 공터에 자신의 사무실을 차렸다. 그는 그곳에 ‘한림 농산 개발 주식회사’라는 거창한 간판을 내걸고,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돼지 매입 계약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빳빳한 현금 다발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돈의 유혹 앞에서, 사람들의 신뢰와 약속은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있었다.
임피제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방 창가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낡은 단파 라디오의 전원조차 켜지 않았다. 방 안은 완전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는 자신의 시스템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가장 강력하고 교활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바이러스의 이름은, 아마도 ‘효율’ 혹은 ‘욕망’일 터였다. 진짜 위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