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삼춘 옵데강

by 고강아놀자


시간은, 마치 실력 좋은 소매치기처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훔쳐 달아난다. 청춘, 열정, 그리고 기억의 선명함 같은 것들. 20년이라는 세월은, 한림의 낮은 지붕들 위로 수없이 많은 계절을 실어 날랐고, 테쉬폰의 둥근 지붕 위에는 이제 세월의 더께가 녹청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세상은 ‘밀레니엄’이라는, 어딘가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단어를 지나, 2004년이라는 새로운 좌표 위에 서 있었다.

그해 봄, 금악성당에는 새로운 주임신부가 부임했다.

마을은 조용한 흥분으로 술렁였다. 새로 온 신부는, 또다시 푸른 눈의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임피제 신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쉰을 갓 넘긴, 여전히 단단한 체격의 중년이었고, 그의 푸른 눈에는 늙은 사제의 희미한 관조 대신, 세상에 대한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유쾌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미사는, 일종의 작은 사건이었다. 그의 한국어는 놀랍도록 유창했지만, 그 억양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의 표준어와, 20년 전의 낡은 제주 사투리와, 그리고 아일랜드의 투박한 억양이, 마치 사이좋게 술이라도 한잔 걸친 것처럼, 사이좋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그는 성당 마당에서 신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농담을 건넸다. "아이고, 우리 어멍들, 폭싹 속았수다(어머니들, 많이 고생하셨어요)." 그의 어설픈 제주 사투리에, 할머니들은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성당에 낡은 CD 플레이어를 가져다 놓았다. 주일 미사가 없는 평일 오후, 그의 작은 사무실에서는 종종, 그가 젊은 시절에 들었을 법한 1990년대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의 <Dreams> 같은 노래. 아일랜드 특유의 몽환적인 선율과, 꿈과 현실이 뒤섞인 듯한 그 노래는, 낯선 땅에 다시 돌아온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마을의 젊은 세대는 그를 그저, 유쾌하고 조금은 별난 외국인 신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을의 노인들은, 그의 푸른 눈과, 그의 기묘한 억양 속에서, 아주 오래전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또 다른 푸른 눈의 사제를, 희미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미카엘 리어던. 이제는 ‘이어돈 신부’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20여 년 전, 그는 이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수의사가 되었고, 더블린 근교에 자신의 병원을 열었다. 병원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유능했고, 성실했으며, 동물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는 좋은 차를 몰았고, 안락한 집에 살았으며, 주말이면 친구들과 펍에 모여 기네스 맥주를 마셨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공간이 있었다.

그는 종종, 제주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도시의 불빛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어둠 속에서, 마치 손에 잡힐 듯 쏟아져 내리던 그 무수한 별들. 그는 김만수의 거친 손과, 양순임의 단단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떠나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지막이 속삭이던 늙은 사제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자네 같은 사람이, 이곳에 필요하네."

그 말은, 그의 심장에 심어진 작은 씨앗이었다. 그 씨앗은 지난 20년 동안, 그의 내면에서 아주 느리지만, 끈질기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성공적인 수의사로 살아갈수록, 자신의 삶이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기술은 부유한 사람들의 애완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재산인 늙은 소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을. 그의 시간은 돈을 버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을.

마흔이 넘은 늦은 나이에,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는 병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모두가 그를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을 돌아, 마침내 진짜 자신의 길을 찾아냈다는 것을.

그리고 2004년, 그는 마침내 사제가 되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섬, 제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가 원했던 유일한 부임지는, 바로 이곳, 금악성당이었다.

이어돈 신부는 부임 인사를 마친 며칠 뒤, 낡은 국산차를 몰고, 정물의 언덕으로 향했다. 그의 심장은,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소년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20년 만에 다시 찾은 이시돌의 풍경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그가 떠날 때만 해도 황무지였던 곳에는, 하얀색의 깔끔한 병원과 양로원, 그리고 유치원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목장의 규모는 몇 배는 더 커져 있었고, 모든 것이 훨씬 더 체계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양로원의 작은 방, 창가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임피제 신부였다.

그는 이제 여든에 가까운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등은 아일랜드의 늙은 떡갈나무처럼 구부정해졌고, 한때 바다를 담고 있던 푸른 눈동자는 이제 짙은 안개가 낀 새벽의 수평선처럼 희미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었고, 담요를 덮은 그의 무릎 위에는, 낡은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이어돈 신부는 그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는 잠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2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그의 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신부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왔습니다. 미카엘입니다."

임피제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희미한 눈은, 눈앞의 낯선 중년 사제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그저, 아주 오랜만에 듣는 아일랜드 억양에,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오셨는가 보군."

"예, 신부님. 더블린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서 신부님과 함께 돼지들의 변비를 걱정했었지요."

이어돈 신부의 농담 섞인 그 한마디에, 임피제 신부의 잿빛 눈동자 속에서, 아주 희미한 불꽃이, 파르르, 하고 타오르는 듯했다. 그는 손을 뻗어, 이어돈 신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앙상하고 차가웠지만, 그가 손을 잡는 힘은, 여전히 단단했다.

"…미카엘." 늙은 사제의 입에서, 20년 전의 그 이름이,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돌아왔구나. 정말로, 돌아왔어."

"신부님께서, 제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손을 잡고, 창밖의, 여전히 푸르른 목장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 세대를 넘어 이어진 두 개의 푸른 눈. 하나는 이제 모든 것을 이루고 저물어가는 노을의 빛을, 다른 하나는 이제 막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새벽의 빛을 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이어돈 신부는 임피제 신부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주일 미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휠체어를 끌고 나타났다. 그는 늙은 사제를 태우고, 한때 그들이 함께 걸었던 목장의 오솔길을, 아주 천천히 산책했다. 임피제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만든 왕국의 풍경을, 새로운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보는, 늙은 왕과도 같았다.

이어돈 신부는, 임피제 신부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모든 시스템의 역사와 철학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는 양순임과 김만수, 그리고 이제는 중년이 된 4-H 클럽의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지난 20년의 영광과 상처의 시간들을 배웠다.

마을 사람들은, 두 푸른 눈의 사제가 함께 있는 풍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깨달았다. 한 사람의 위대한 꿈이, 이제 또 다른 한 사람에게로, 소리 없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늦은 오후, 두 사람은 정물의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세상의 모든 것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어돈 신부의 작은 CD 플레이어에서는, U2의 <One>이 흐르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또 다른 아들들이 부르는, 우리는 하나이지만 서로 다르며, 그래서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는 그 노래.

임피제 신부는, 저 멀리 보이는 병원과, 양로원과, 그리고 푸른 초지 위를 평화롭게 거니는 양 떼를,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아주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든든한 후계자의 어깨에, 자신의 앙상한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의 일은, 이제 정말로 끝났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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