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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콬콬 Jan 06. 2016

소설을 읽는다

1화. 시작하며

                                                                                            그림_ 루셀 <책 읽는 처녀>

                                                   

내가 너무 후져서 기분이 우울하면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고 싶지 않다. 거절을 당하거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가슴이 쓰리다.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을 벌였거나, 소리를 지르며 누군가와 싸우고 돌아온 밤. 이런 내가 참 실망스럽다. 성경을 펴들고 기도를 하다가 그냥 침대에 모로 누워버리고 만다.

  나란 인간을 속깊이 들여다보면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내 잇속 차리느라 남의 형편 헤아리지 못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좋은 면들도 있지만 미숙하고 어리석어서 못 나게 굴어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도 많은 게 사실이다. 이런 내가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의 성격이 독특하고 매력이 돋보이며 심지가 굳고 내면에서 반짝이는 빛이 눈부시면 이 사람 어쩌면 이리 나와 비슷할까 싶다. 사람 참.     


누구나 자신의 속엣 것들을 바깥에 다 꺼내놓고 살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섬처럼 간직하고 사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손으로 밥숟가락 들 듯 공중부양을 하지 못 하는 것과 이치가 같다. 우리가 중력의 한계 안에서 살듯 고독 역시 인간을 두른 테두리이다. 

해질녘 저녁 하늘에 어슴푸레 퍼지는 검고 푸른 빛에 가슴이 아스라해지는 순간, 지하철 유리창에 이마를 맞대고 기댔다가 유리창에 비친 어떤 사람의 눈동자에 드리운 허무를 보고는 먹먹해지던 때 같은. 이렇게 격렬하게 일어나는 감정과 갈등을 겪는 모든 순간들은 차곡차곡 내 속에 쌓일 뿐이다.

곁에 있는 타인에게 들려주는 '당신의 몸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본 것들, 누구누구에 관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소문들이거나 뜻없이 보이는 호응이 대부분이다. 만약 당신과 내가 마주 앉아 우리 각자의 심연을 서로에게 보인다면 어떨까. 우리는 너무 놀라서 얼굴이 벌개진 채 각자 자신의 가방을 챙기면서 허둥댈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가보다. 타인에게 내보여 큰 상처를 얻는 위험을 겪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으면서 나의 심연, 내 안의 어두운 속과 마주 보는 순간이 바로 소설을 읽는 시간이다. 나처럼 못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감당하는 내 삶의 불안과 고통과 공포를 다독이면서 불길이 약해진 생의 초가 다시 잘 타오르도록 입김을 후후 불어 주는 시간 말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 게 사실이나, 우리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먹고 사는 문제는 정말 중요하고 무엇보다 우선 순위에 속한다. 그런데 사람은 그 문제만 해결하고서는 살 수 없다. 인간의 심연에는 자기 몸무게를 훨씬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남극보다 춥고 아프리카 대륙의 사막보다 더 황량한 모래 바람이 부는 거대한 늪과 같다. 그 늪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적어도 ‘아프지 말고’ 살 수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펼치고 도스토예프키가 마치 자기가 전해들은 소문과 그 일에 얽힌 사람들 얘기를 내 눈앞에서 들려주듯 술술 써놓은 문장들을 읽다보면 ‘정말 나 정도 후진 인간은 못났다고 말도 못 하겠구나.

진짜 똘끼란 똘끼는 도선생 글에 다 모였네!' 싶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광기가 고인 문장들을 읽는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나란 인간의 허물이 좀 시시하게 여겨진다. 

  잠이 오지 않아 침대 머리맡의 붉은 등을 켜고 체홉의 단편을 읽으면 탁자 위에 둔 안경이나 둥근 빗에 엉킨 내 긴 머리카락들, 책상에서 굴러 떨어져 문지방 사이에 낀 연필들이 아무 것도 아닌 사물에서 뭔가 내 삶의 맥락과 이어지는 의미로 바뀐다. 체홉은 사람이 걷고 뛰고 눕고 다가가는 동안 풍기는 감정의 미세한 결들을 하나하나 다 알아보는 남자이다. 나는 그의 단편을 읽으며 내가 나의 삶에서 만나고 싶었던 누군가, 그러니까 아주 섬세하고 진지한 남자의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체홉의 세계는 우아하고 짙은 의미로 가득차서 나는 그의 공간에 속한 사람이고 싶어진다. 나도 체홉의 눈으로 타인들의 허영심을 조금 우스꽝스럽게 여기며, 그러니까 너무 야멸차게 비판하지 않으면서 바라볼 수 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다 읽고 나서는 정말 백 년을 산 기분이 들었다. 69를 읽었던 아주 오래 전에는, 지하철

구석자리에 구부정하게 앉아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낄낄거렸던지. 건너편 의자에 앉았던 사람들이 도대체 저 아가씨 무슨 책을 저리 재미나게 보나 싶어 힐끔거렸던 기억이 난다. 

또한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해했던 낯선 대륙과 과거의 시간을 소설을 읽으면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나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으며 막연하게 그려보았던 고대의 그리스인들이 오디세이아일리아스에서 더 또렷한 얼굴로 다가왔다.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오래 전 그리스에서 실제로 살았던 구체적 인간, 혈기 넘쳤던 그들의 정념과 개성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이 긴 이야기를 단 한 문장으로 줄여야겠다. 외로워서 소설을 읽는다고 말이다. 나는 용기 내어 자신의 외로움과 직면할 수 있어야 타인의 외로움을 알아본다고 믿는다. 나의 외로움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외로운 당신을 위해 뭔가 멋진 일을 해보려고 궁리를 할 수 있을 거다.

   내 인생의 어떤 시절들을 소설을 읽으며 잘 버텼고 지금도 그렇다. 소설은 누군가의 '속'이 담긴 이야기이고 이런 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의 생을 위로하려고 한다. 이것은 잘 살아가려는 적극적인 행위, 내게는 그렇다.

 이 세상을 떠도는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들 속에서 오래도록 버티고 살아남은 이야기들. 고독을 감당하며 사는 우리 곁에 오래도록 함께 한 세계의 문학을 찾아서 같이 읽는 것. 외로운 당신과 내가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멋진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첫 번째로 함께 읽는 작품은 바로 <제인 에어>.   


  

책을 끼고 사는 9살짜리 고아 제인. 더부살이하는 외갓집의 또래 사촌들과 달리 자기 나름의 ‘의견’이 있는 어린 소녀이다. 아이는 친척들 누구도 자기를 돌봐주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주변 세계를 관찰한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들, 미묘한 감정, 모인 사람들 중에서 누가 다른 이들을 휘두르는 힘을 지닌 자인지.

  제인은 인간의 모난 점들, 숨겨진 악의 같은 것들을 알아본다. 세상에는 환한 빛을 비추는 조명 뒤편에 늘어진 그림자에서 의미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인 에어도 그런 눈을 가진 인물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2화. <제인 에어>, ‘위대한 제인’의 낭만적 사랑과 독립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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