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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추위 Sep 22. 2022

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33 알코올중독자 장기요양등급을 신청하다

2022. 8. 10(수)

장기 요양 등급 신청을 해보기로 결정하고 소견서와 입원확인서를 가지고 건강보험공단을 방문했다 주민센터나 은행처럼 창구가 따로 있을 것 같았는데 장기 요양과 관련된 업무는 별도로 마련된 상담실로 안내를 받았다

나이가 좀 있으신 남자분이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나를 맞이하셨다

각자 다른 사정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수도 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왔을 그분의 업무가 말투 하나로 짐작됐다

ㅡ 장기 요양 등급에 대해서는 알고 온 건지? 1등급부터 5등급까지 환자 상태에 따른 등급별 지원에 대해 설명하셨다

ㅡ 신청 후 처리 절차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신청서가 접수되면 1~2주 후 공단에서 직원이 아빠를 직접 만나 1시간 정도 면담을 하며 상태를 면밀히 따져보고 (의사 소견서) 제출을 요청할 거라 했다 신청할 때 제출한 (소견서)와 (의사 소견서)가 다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빠 덕분에 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다

ㅡ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묻는다. 간병인이 필요한지? 목욕이나 간병 같은 일상생활에 도움을 받고 싶은지?

나는 지금 입원해 있는 병원의 주치의께서 장기입원을 권하셨고 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소 시키고 싶다고 했다

ㅡ 침대에 누워 거동을 못하시는 게 아니라면 요양원 입소가 가능한 1,2등급 판정을 받기란 어렵다고 했다 요양원 입소가 불가능한 등급이 나오더라도 치매 등의 이유로 예외를 적용한다 하니 감사한 일이었다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부양하고 계셨으며 할머니는 암 환자시고 나는 어린 자녀를 키우는 워킹맘이고 동생은 타지에 살며... 등등 아빠를 직접 보살피지 못하는 이유 등을 소명해야 할 거란다


환갑도 안된 아빠를 요양원에 입원시켜야 하는 딸의 처지가 딱했는지, 곧 있을 동생의 결혼식에 아빠를 모실 수 없는 상황이 이해가 되셨는지 사무적이었던 직원은 한결 따뜻한 말투로 나를 위로한다

친절한 상담에 감사함을 표시하자 직원은 이렇게 잘 들어주시면 본인들도 감사하노라 했다 다짜고짜 화를 내며 따지는 분들도 꽤 많은 모양이었다


"가족들도 살아야죠 무슨 수로 다 감당을 합니까? 물론 요양원에 들어가시면 처음에는 힘들어하실 거예요 적응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또 다들 적응하며 살아요 어렵고 힘든 일 있으면 저를 찾아오세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애써 눈에 가득히 담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낯선 이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터져 나온 눈물을 화장실로 가서 황급히 지웠다

마음을 추스르며 집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변경하고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내일은 웃고 싶으니 하루 몰아서 힘들 자는 심산이었다

지난 몇 달간 고민이었던 아빠의 채무 고민을 조금 덜 수 있지 않을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몇 년 전 아빠를 직접 모시고 와 채무조정 신청을 함께 해드렸던 그 장소이다


비가 많이 내리던 여름 날 오후.


주차장은 협소하고 장대 같은 비에 아빠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해 넣은 서류 파일을 차에서 꺼내느라 비를 조금 맞았다. (아빠의 인적 사항 및 관계 증명을 위해 주민등록등본 및 가족관계증명서, 관련 우편물들을 웬만하면 가지고 다닌다. 본인이 아닐 때 업무처리가 복잡하거나 불가한 경우를 이미 꽤 여러 번 경험해 본 탓이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할 정도로 북적했던 공간이 조용하다

느낌이 쎄하다 싶더니 상담 시간이 끝나고 직원들만 남아 분주히 마감을 하고 계셨다 아쉬운 대로 안내 데스크에 직원을 붙잡고 아빠의 사정을 이야기 봤다.

"채무자 본인이 상담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딸인 제가 왔는데 상담이 가능할까요?"

이곳은 은행과 같아서 본인이 아니면 상담 자체가 불가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미 채무 독촉장이 날아왔다면 기존에 납입 중이던 빚조차 실효됐을 거라고....


직원은 데스크 창구 앞에 덩그러니 놓인 메모지를 한 장 가져가라고 했다

대리 신청(상담 및 접수) 시 구비서류.....


하..... 인감증명서!

이건 또 아빠가 폐쇄병동에 계신데 어떻게 떼올 수가 있나요?

정작 당사자는? 일만 벌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가족은 무얼 할 수 있나요?

아빠의 기초 생활 수급비로 조금씩이라도 납부 가능한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는 채무 독촉장과 압류 통지를 받아보는 것뿐. 깊은 시름은 언제나 가족의 몫이다.


알코올중독이든, 치매든, 가정불화든, 어떠한 이유에서건 협조할 수 없는 관계의 가족들은 문제 하나를 가족들이 도와 해결해 보려 해도 할 수가 없다. 그 관계가 끝나야 해결이 되는 슬픈 현실.


오늘 하루도 몇 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다가 그 다음은 길이 없어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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