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가족의 인연

- 평생의 인연

by 꽃샘추위

이쯤에서 잠시 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80년대 생들이 그러하듯 나도 IMF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며 조금 힘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으므로 외환위기가 준 경제상황에 타격을 입었다기보다는 조금씩 쌓여온 가난과 가정불화가 그 무렵 부모님의 이혼으로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듯싶다.

성인이 된 어느 날 초본을 떼어봤는데 페이지가 4페이지나 됐다.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이사를 서른 번 가까이 다녀서 주소지 변동이 많았던 까닭이다. 나의 불안했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기록에 박힌 것 같아서 씁쓸했다.

짧게는 4~5개월, 해가 바뀔 때마다 다른 동네도 아닌 한 동네 안을 전전하며 이사를 다녔다.

중학교 시절 학교 앞 반지하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방에 유일한 작은 창문을 열면 교복을 입고 개미떼처럼 줄지어 걸어가는 학생들의 발만 보였다. 언덕길을 몇 미터만 쭉 올라가면 바로 학교였으니 등굣길에도 하굣길에도 대문을 열면 항상 학생들을 마주쳐야 했다. 나는 누군가와 마주쳐 나의 초라한 반지하 집을 들키게 될까 봐 문 밖을 나서는 것도,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도 항상 두려웠다.

부모님의 갈등이 폭발할 무렵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는데 보다 못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본가로 들어와 같이 살자 하셔서 갑자기 전학을 가야 했다.

부모님과 동생은 먼저 본가로 이동하고 나는 전학이 늦어져 친구네 집에서 며칠 신세를 져야 했는데 그 친구네 집도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오빠와 친구 둘 뿐이었다.

어느 날 친구와 먹다 남은 김밥을 계란 물에 적셔서 프라이팬에 구워 먹었는데 맛있게 먹다 보니 접시에 커다란 바퀴벌레가 바삭바삭 함께 구워져 있었다. 그 걸 먼저 본 나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는데 나중에야 발견한 내 친구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어쩔 수 없지~하며 태연하게 접시 위에 남은 김밥을 다 먹어 치웠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작은 바퀴벌레 하나에도 나약한 사람이지만 그 친구는 나랑은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전학을 가서 연락이 끊겼다가 성인이 된 후 수소문하여 만난 적이 있는데 멋진 구급대원이 되어 있더라.

며칠을 머무르다 전학 갈 고등학교가 정해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면서 엄마는 며칠간 신세 진 친구네 집에 감사 표시를 해야 한다며 쌀을 한 포대 사주셨다.

몇 안 되는 유년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이 친구와 지낸 며칠은 여전히 고마움으로 기억된다.


전학을 하고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면 조금 나아질까 싶었지만 불안했던 나의 유년시절만큼 긴 시간을 불행했던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버렸다.


엄마, 아빠가 이혼도장을 찍던 날 할머니는 네가 따라가 애원하고 울고불고 라도 해서 이혼만은 막으라는 특명을 내게 주셨다. 학교 가는 날이었는지 나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쭈뼛거리며 법원 앞 다방에 들어갔다. 아빠는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나는 엄마에게 눈물로 애원했지만 이미 차갑게 굳은 엄마의 얼굴이 그 어떤 것도 소용없음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17년 결혼 인생이 정말 끝나버렸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보다 8살 어린 동생이 엄마 잃은 슬픔 때문이었는지 남의 돈에 손을 대서 혹시라도 사람 하나 망치나 싶어 다들 겁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9살이 된 동생에게 엄마의 부재는 나보다 더한 슬픔이었으리라.

다행히 그 사건으로 인해 동생은 다시 엄마가 키우게 되었고 나는 할머니가 싸주는 도시락으로 연명하며 수험생 시절을 보냈다. 근근이 공부하여 전문대학에 입학하고는 작은 아빠 댁에서도 5년 정도 신세를 졌다.


그렇게 성인이 됐다. 나의 의지와 목표대로는 살아본 적도, 아니 의지와 목표를 가져보지도 못한 것 같다.

tv를 보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공부에 정진하여 명문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거나, 훌륭한 의사, 운동선수, 연주자가 된 사례도 많던데 나는 근근이 살다가 그저 평범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보육교사가 됐다. 그 시절 간절한 꿈 하나 갖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뭔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하나는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인연은 어른이 된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서 아빠가 두 번째, 세 번째 부인과의 불화로 큰 싸움이라도 났다 하면 법원 앞의 그날처럼 할머니의 호출로 달려가 중재 역할을 해야 했고, 가끔은 집 나온 아빠에게 용돈을 쥐어주기도 하고 나의 자취방에서 아빠를 지내게 해주기도 했다.

나의 두 번째 자취집은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면 마당이 정말 예쁜 곳이었는데 실제로는 2층이지만 언덕 쪽에 위치한 쪽문으로 들어와 계단을 통해 내려와야 하는 구조였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그 계단을 내려오다 굴러 떨어져서 유혈이 낭자했던 그 밤엔 놀라서 얼마나 심장이 떨렸는지 모른다. 그 무렵 하얗게 피어나 탐스러웠던 목련 꽃은 생기를 다해 누레지다가 갈색으로 시든 채 떨어져 수북이 쌓였었는데 아빠는 생기를 다 한 그 목련 꽃 같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는데 아빠의 생일이라 아빠가 지내고 계신 셋방에 미역국을 한 냄비 끓여갔었다. 미역국과 밥을 드시라고 놓고는 방바닥에 뒹구는 동전들과 막걸리 병을 보고 한 숨 지었다.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 사 드리자 허겁지겁 맛있게 드신 그 비 오는 날에도 아빠는 두 번째 부인과의 싸움으로 집을 나와 계신 중이었다.


나는 정말 다행히도 술 안 마시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나의 본가는 모였다 하면 술을 한 짝씩 사다 놓고 밤새 마시다가 다음날에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엉켜서 자는 말 그대로 술꾼들의 집인데 심지어, 고모부들도 다 술을 좋아하셨다. 시댁은 아버님도 소싯적 술을 꽤나 드셔서 술 외상값을 어머님이 결혼한 후에도 한참을 갚았단 말을 듣기도 했으나 어느 날 딱 끊으시곤 일절 입에 안 대신다고 했다. 명절에 모이면 술 상을 몇 번씩 새로 차리고 그 상에서 끼니때가 되면 밥도 먹었던 우리 집과는 상반된 분위기에 문화충격을 받았다.

마음 좋으신 나의 시부모님은 생각이 날 때마다 친정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어주시지만 알코올 중독자인 사돈의 근황을 곧이곧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게 '며느리'이다.

그래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가 정한 선 안에서 내 가족들의 안부를 전한다.

내 아이가 유치원생이 되어 유치원 발표회를 한 그날에 발표회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끝나자마자 딸아이와 함께 아빠가 계신 알코올 병원에 면회를 다녀왔다.

외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가져다줄 게 있으니 주고 오겠노라며 딸아이에게 설명했다. 병원 로비에서 핸드폰을 보며 기다리게 하고 2주 만에 아직도 눈에 술을 품고 있는 아빠를 보고 내려와 떨리고 쿵쾅대는 마음을 딸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참으로 많이 애썼다.

나의 불안하고 슬픈 마음이 전해질까 싶어 휴게소에 들러서는 예쁜 조각상과 꽃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진도 함께 찍었다.

그리고는 둘째 아이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늦을까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이 되면 가정불화로부터, 술 좋아하는 사고뭉치 아빠로부터 벗어나 나는 내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결혼을 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될 때까지도 그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마음이 흐려져 갈팡질팡 하지 않는다는 뜻의 불혹이 되었는데 여전히 내 마음은 갈팡질팡이다.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몸이 부르르 떨리는 날에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 고통인 '가족의 인연'이 너무나 원망스러워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건 죽어야 끝난다고....'


고독사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알코올 중독 커뮤니티 속 누군가의 댓글처럼 지친 내 마음도 어느새 '포기'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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