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44 미련도 분노도 미움도 남지 않았다
측은지심
惻 : 슬퍼할 측
隱 : 근심할 은
之 : 의 지
心 : 마음 심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은 측은지심.
이제 더 이상 미련도 분노도 미움도 남지 않았다
지난 주말 내가 집에 왔으면~ 하던 아빠와 통화하며 새까만 발바닥 깨끗이 씻었나 확인하러 불시에 찾아가겠노라 으름장을 놓았었다
퇴원한 이후 두 번째로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
아빠가 날 만나는 하루,
반나절만이라도 좋으니 잠시나마 술에서 깨어 있으시기를.
한 끼라도 따뜻한 밥 한술을 뱃속에 품고 포근한 단잠을 주무시길.
따끈한 닭죽과 전복죽, 부드러운 빵을 사서 찾았다
낮 12시. 여전히 빛 한줄기 없는 캄캄한 방에 빨간 난로를 켜놓고 쩌렁쩌렁 티브이 소리에 파묻혀 누워있는 아빠.
"아빠! 나 왔어요. 죽 사 왔으니까 얼른 일어나. 같이 먹자"
지난주에 방문을 예고해 놨기 때문인지 양호한 컨디션으로 부스스 일어난 아빠는 소포장한 죽 한 그릇, 빵 두 입, 따뜻한 물 한 잔을 호로록 불어 드셨다.
그러고는 다리를 절뚝이며 슬리퍼를 신었다 벗었다 담배를 피우시기 위해 여러 번 문지방을 넘어 다녔다. 슬리퍼 구멍에 발을 맞춰 끼우는 것조차 힘들어 몇 번씩 헛 발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또 한 번 마음속 돌무더기가 후드득 쏟아져내린다.
방 청소를 해드리며 아빠에게 물어봤다
"아빠. 또 동네병원에서 수면제 타다 드셨구나. 작은 병원은 약을 길게 안 주더라. 약도 이제 없네. 그러지 말고 잠 잘 오고 술 생각 덜 나게 나랑 같이 입원했던 병원 가서 진료 보고 약 한 달 치 타오는 거 어때요?"
"그럴까? 그런데 네가 바빠서 갈 수가 있겠어?"
"아빠가 가신다면 출근 전에 아침 일찍 모시러 올게. 내가 아침에 전화할게요"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약이라도 타와서 드시게 해볼 심산이었다
항우울제, 항갈망제라도 드시면 좀 덜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집을 나서면서도 아빠가 정말 병원을 함께 따라나서긴 할 건지 확신이 서진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아침,
아빠를 모시러 온 내게 아빠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셨고 병원에서는 허탈함과 놀라움으로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
어쨌거나 이건 하늘이 두 번 도운 게 틀림없다.
"아빠, 하늘도 이렇게 돕는데 자꾸 그렇게 사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