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담론의 중심은 '나'여야 합니다.
'담론'의 사전적 의미는 [담화하고 논의함]이고,
조금 더 길게 확장해 보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신영복 선생님의 성공회대에서의
마지막 학기 강의 녹취록의 발견을 계기로 활자화되었습니다.
물론 강의이기 때문에,
강의에 걸맞은 수업명이 있었겠지만
'담론'이라는 제목이 훨씬 더 조화롭습니다.
제목에 걸맞게 매우 방대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와
생각들이 공유됩니다.
주로 평소에 어렵다고 느끼는 고전 내용 소개하고,
작가가 깨달은 경험들을 이야기하면서
먼 이야기가 아님을 느끼게 해줍니다.
가장 놀란 것은 작가의 차분함입니다.
녹취록을 활자화하는 과정에서 조금 다듬어지긴 했더라도,
근본적인 차분함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실제 감옥에서 본인이 겪은 일들을
누가 봐도 너무나 큰일입니다.
그런 큰일을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짜 경험이구나,
과장이 전혀 보태지지 않았구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공유된 많은 경험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깨달음은 결국 실천으로 이어져야 완성된다.
2. 세상 모든 것은 양면적이기에
특정한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3. 어떤 대의명분에도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리에 가까운 깨달음들은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맹자의 주역,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많은
고전에 고스란히 담겨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이 사는 세상은 혼란스럽고 어렵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항상 나아갈 수만 없는데,
매번 성장만을 요구하는 차가움 때문 일까요.
잘 살자고 뭐라도 하는 노력이,
오히려 사람을 배제시키고 고립시키는 모순 때문일까요.
이러한 거대한 모순 속에서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뭘 한다고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는 있는 걸까요?
그래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뀌냐구요? 글쎄요.
살아가면서 공허함과 무력감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잘 사는 것 같았는데 결국 껍데기였네라는 걸
조금이라도 일찍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주변을 조금이라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담론들은 논리적으로 통계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건
법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기에 그 상황에 놓은 사람도 보고,
상황도 보고, 주변도 한 번씩 살펴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바쁘고 지치더라도
적절한 자기 위로와 엄격한 자기 비판으로
하루를 마무리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