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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hail Aug 06. 2021

무지개 방어

전 국민금지기술

무지개 방어!

초등학생 때, 무지개 방어라는 표현을 썼었다.

언제 어떻게 썼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모든 걸 다 막아주는 하나의 기믹이었던 듯하다.

(자매품 무지개 반사도 있다.)


최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이런 무지개 방어의 초식(?)은 다음과 같다.


1. 먼저 '나'의 상태를 단순화하고 상대방에게 알린다.
: 상황을 나의 주관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상대방의 잣대가 닿지 못하게끔 하는 아주 중요한 단계다.

ex) 나는 요즘 힘들다.


2. 대화를 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내 식대로' 아주 단순화/일반화한다.
:  단순화는 마치 '거시적인 것' 같고 '인사이트 넘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비난보다 더욱 효과적이다.

ex) 너는 항상 나의 마음을 몰라준다.


3. 상대방의 모든 말과 태도, 어쩌면 그 존재 자체를 2에 끼워 맞춘다.

: 모든 인간과 상황은 입체적이고 케바케(Case by case)인 데다가 쌍방 책임이란 사실을 잊으면 쉽다.

ex) 지금 내가 힘들다고 하는데도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냐.


4. 1을 심화한다.
: 자, 다시 개인적인 문제로 끌고 올 때다. 여기서 이 초식의 좋은 점은 무한반복이라는 것이다.

ex) 너 때문에 더 힘들어졌다.


이 무지개 방어의 효과는 이렇다.


a. 상대방은 말문이 막히게 된다.
문제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영역으로 끌고 들어갔지만 상대방은 눈치채지 못한다.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더 그렇다. 내 감정 또한 상대방이 책임져야 할 중요한 요소기 때문이다.

기술이 잘 들어간 경우 '그래, 이 사람의 기분이 나쁘다는데 다른 게 뭐가 중요해'로 귀결될 수 있다.

잘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주제가 시프팅 (적어도 다른 주제를 형성) 되었으니 시전자의 입장에서는 상황을 유리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


b. 때로는 나 스스로도 기술에 걸려 '버서커 모드 : 그래 내가 기분이 나쁜 게 제일 중요하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 전투에 더욱 좋다.
 가장 좋은 기술은 시전자 마저 속이는 기술이니까.


c. 상대방을 일반화해 상대방 기분도 더럽게 만들 수 있다.
때로는 '과거의 잘못'까지 끌어오는 광역 효과가 발동할 수 있다.


d. 스스로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거나, 스스로 피해자 프레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면 이 '무지개 방어'가 끝난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죄책감이 없다.

'나는 잘해주려고 했던 거야, 내가 피해를 본 거야.'라는 생각으로 슬픔에서도 쉽게 벗어 날 수 있다.


e. 만약 상대방이 이 '무지개 방어'를 무사히 지나 보낸다 하더라도 다음에 또 써먹을 수 있다.

왜냐면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은 나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때 기분 나빴던 게 아직 안 풀렸다'라고 하자.

또는 상대방이 이 '무지개 방어'를 반사하는 '무지개 반사(나도 기분 나쁜데?)'를 시전 하더라도, 나는 지지 않을 수 있다. 이 역시도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은 나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무지개 방어'에도 약점이 딱 하나 있다.

바로 기술 시전 이후에 나오는 리바운드(반동으로 인한 자체 피해)다.

소중했던 사람을 잃을 수 있고, 사회로 부터 스스로 고립을 시킬 수 있다.


기분이라는 것은 너무 갈대 같고, 그 기분이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

화가 났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무뎌지거나 이제는 별 신경이 안 쓰이는 것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다. 상대방이 있어야 지금의 화를 내는 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래퍼 개코가 이런 말을 했다. '싫어하는 것을 싫어할 시간에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자.'

상대방에게 '허점'을 찾거나 '잘못'을 찾는 것보다는

오히려 필요한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과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가 아닐까.

오히려 필요한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 내가 잘하고 있을까?'가 아닐까.


'무지개 방어'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너무 남발하는 기술이다.

특히나, 서로 소중한 관계에서 더더욱.

이 사회에 하나 제안한다.

웬만하면, 사회가 금지해온 기술은 초등학생 때의 기억으로만 묻어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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