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WACOM>

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by 콜드포인트

1983년 일본 사이타마에서 작은 회사 하나가 탄생했다. 한자로 '조화'를 뜻하는 '와(Wa)'와 컴퓨터의 '콤(Com)'을 합쳐 지어진 이름, 그것이 바로 와콤이었다. 당시 국내는 개인용 컴퓨터(PC) 산업의 연간 시장 수요가 500대도 채 미치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절에 와콤은 연필을 들고 도화지 위에 그리는 창작의 경험을 디지털 세계로 옮기겠다는 대담한 꿈을 품었고, 이제 42년을 바꿔놓은 그 여정의 시작과 현재를 따라가본다.


세계 최초의 무선 펜 타블렛 시대의 개척

와콤의 역사는 1984년 1월 세계 최초의 무선 펜 디지타이저인 'WT 시리즈'의 출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초기 판매량은 예상보다 저조했지만, 전자 캐드(CAD) 프로그램과 전용 디지타이저를 개발하면서 산업용 도구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후 와콤은 기술 혁신에 집중했다. 1986년에는 'WT-460M'을 공개했는데, 펜 안에 자석과 배터리를 내장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비록 이 방식은 자석이 플로피 디스크 같은 자기 저장 장치를 손상할 우려가 있어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현재의 전자기 공명 기술(EMR)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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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혁신은 1987년에 찾아왔다. 무선이면서도 배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자기 공명 방식의 펜을 탑재한 'SD 시리즈'가 출시된 것이다. 이때부터 필기구 형태의 펜 모양과 무배터리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60도의 기울기를 감지하고 압력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펜 기술이 완성되었다. 이 기술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와콤 제품의 핵심이 되어있다. 당시 일본의 경기 침체로 판매량이 불안정했던 와콤을 구원한 것은 뜻밖에도 영화 산업이었다. 1990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Walt Disney Company)로부터 와콤의 펜 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산업에서 와콤 타블렛이 널리 채택되기 시작했다.


대중화의 길을 열다: 아트패드(ArtPad)부터 인튜어스(Intuos)까지

1994년 12월, 와콤은 처음으로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ArtPad'를 출시했다. 이것이 B2C(소비자용) 펜 타블렛의 시초였다. 당시 ArtPad는 256 수준의 필압 감지 기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기업용 UD 시리즈의 약 1/3 가격인 25,000엔대에 판매되면서 개인 소비자 시장을 빠르게 점유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만 해도 와콤이 시장의 80% 이상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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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8년 발표된 'Intuos(인튜어스)' 시리즈는 와콤의 대표 제품으로 자리잡았다. 인튜어스는 그 뒤를 이은 'Graphire(그라파이어)', 'Bamboo(뱀부)' 시리즈와 함께 25년 이상 학생과 전문 아티스트, 취미 창작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시리즈명은 변해도 인튜어스의 철학은 일관되었다. 높은 필압 감도, 정교한 세밀함, 그리고 손에 착 감기는 터치감. 이것들이 모여 디지털 드로잉을 하는 창작자들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화면 위에 직접 그리다: 신티크(Cintiq) 시대

와콤이 이룬 또 하나의 혁신은 2001년 출시된 'Cintiq(신티크)' 시리즈다. 펜 타블렛은 손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모니터에 나타나는 간접적인 경험이었다면, 신티크는 액정 디스플레이에 펜으로 직접 그리고 쓸 수 있는 제품이었다. 이것은 진정한 혁명이었다. 마치 종이 위에 그리듯이 손과 눈의 거리를 없애주었고, 많은 전문 아티스트들이 이를 환영했다. 초기 신티크는 기업용으로만 판매되었고 168,000엔이라는 높은 가격대였지만, 산업 표준이 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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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와콤 신티크 15X (2001) 우: 와콤 신티크 프로 27 (2022)



2019년 신티크 라인업이 약 20년 만에 완전히 재설계되었다. 새로운 신티크는 더욱 슬림해졌고, 화면 해상도가 개선되었으며, 새로운 세대의 펜 기술이 적용되었다. 2024년과 2025년에 출시된 신티크는 이전 세대 대비 베젤이 얇아지고 작업 영역이 넓어졌으며, 2.5K 해상도(WQHD 2560 x 1440)를 지원한다. 프로 펜 3와의 조합으로 8,192 필압 레벨의 극도로 정밀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펜 기술의 집약체: 프로 펜(Pro Pen)의 진화

와콤이 펜 기술에서 얼마나 진지했는지는 'Pro Pen(프로 펜)'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다. 초기 아트패드의 256 필압에서 출발한 압력 감지 기술은 지속적으로 진화했다.

WACOM Pro Pen3

2009년 인튜어스 4가 출시될 때는 2,048 필압 레벨로 올라왔고, 이는 전문 아티스트들에게 선과 음영의 미묘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프로 펜 2는 8,192 필압 레벨과 60도의 기울기 감지 기능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프로페셔널 경험을 제공했다. 무건전지, 무충전, 무배터리의 '3무' 기술로 배터리 걱정 없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출시된 프로 펜 슬림은 손이 작은 사용자들을 위해 9.5mm의 얇은 두께로 다시 설계되었다.


가장 최근의 프로 펜 3은 와콤이 40년 이상 축적한 펜 기술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 현존하는 펜 중 가장 얇은 8.35mm 두께로 설계되었으며, 3개의 사이드 스위치를 통해 사용자가 원하는 기능을 빠르게 실행할 수 있다. 그립의 두께, 무게추, 버튼 활용까지 총 36가지 조합으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어, 각자의 창작 스타일에 맞는 펜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




펜 타블렛의 새로운 경험: 인튜어스 프로의 2025년 대변혁

와콤의 최신 기술력은 'Intuos Pro(인튜어스 프로) 2025'에 집약되어 있다. 이 제품은 현존하는 모든 펜 타블렛 중 가장 얇은 4mm의 두께를 자랑한다. 이는 책상과 손 사이의 단차를 거의 없앤다는 의미로, 손을 이동시킬 때 자연스러운 그리기가 가능해진다. 동시에 작업 영역은 오히려 더 넓어졌다. 16:9 화면 비율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대부분의 모니터 화면 비율과 정확하게 맞춘 것이다.


인튜어스 프로 2025는 기계식 다이얼 휠을 새롭게 추가했다. 상단으로 옮겨진 익스프레스 키와 함께 이 다이얼은 키보드와의 동선을 최소화시켜, 엄지손가락만으로 편하게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무게 역시 이전 세대의 700g에서 411g으로 40% 이상 줄어들어 휴대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프로 펜 3를 처음으로 탑재한 펜 타블렛으로서, 최고의 펜 성능과 함께 5,080 LPI(Line Per Inch)의 높은 해상도로 매우 세밀한 작업을 지원한다.


모두를 위한 와콤: 보급형에서 프로페셔널까지

와콤은 항상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을 제공해왔다. 'One(원)' 시리즈는 초보자와 학생, 취미 창작자들을 위한 합리적인 가격의 입문용 제품으로, 2020년 처음 출시된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디지털 드로잉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와콤 원 펜 타블렛은 4,096 필압 단계의 현대적인 펜 기술로, 초보자도 높은 수준의 필압 감지를 경험할 수 있다. 최근 출시된 'One 14(원 14)'는 14인치의 액정 디스플레이를 더욱 합리적인 가격대에 제공하면서, 전문가들의 서브 기기로도, 학생의 주요 창작 도구로도 자리잡고 있다.


'MovinkPad(무빙크패드)' 시리즈는 휴대성을 강조한 제품들로, 태블릿과 화면을 결합했으면서도 가볍고 콤팩트한 설계가 특징이다. 특히 2025년에 출시된 무빙크패드 프로 14는 OLED 14형 3K 디스플레이에 699g의 초경량 무게와 5.9mm의 슬림 두께로, 프로페셔널한 이동성을 요구하는 창작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기술 개방과 생태계 확장

와콤의 영향력은 단순히 자신의 제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2010년 전자기 공명 기술(EMR)의 특허가 만료되면서 다른 기업들도 펜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와콤의 펜 기술과 사용 경험은 여전히 업계의 표준으로 평가받는다. 2011년 삼성과의 협업으로 갤럭시 노트 시리즈에 와콤 펜 기술이 탑재되었고, 이는 스마트폰 시대에 와콤의 기술력을 대중에게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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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와콤은 범용 디지털 잉크 표준인 'WILL(Wacom Ink Layer Language)'을 개발했다. 이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과 플랫폼에서 자연스럽고 일관된 디지털 잉크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기술로, 산업 전체의 표준화에 기여했다. 현재 와콤은 매년 'Connected Ink' 이벤트를 개최하여 디지털 펜과 잉크 기술을 통한 예술적·교육적 혁신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의 와콤, 미래를 향해

2024년과 2025년 와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정교해진 기술과 인체공학적 디자인으로 시장에 신제품들을 내놓고 있다. 신티크 16과 24는 WQHD 2.5K 해상도로 업그레이드되었고, 프로 펜 3의 뛰어난 성능을 활용한 제품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인튜어스 프로 2025는 펜 타블렛의 물리적 극한을 다시 정의했으며, 무빙크패드 프로 14는 휴대용 창작 도구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와콤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4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연필의 감촉을 디지털로 옮기려던 창립자의 작은 꿈은, 지금 전 세계 수백만의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거대한 생태계가 되었다. 아티스트, 디자이너, 애니메이터, 일반인까지 누구든 와콤의 펜을 들고 자신의 창의력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은 계속 진화할 것이고, 와콤은 그 중심에서 '디지털 펜으로 손으로 하던 창작을 가능하게 한다'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켜나갈 것이다. 다음 42년도, 그다음 세대들도 와콤의 펜으로 자신의 꿈을 그려나갈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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