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 <PANTONE>

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by 콜드포인트

1963년 한 명의 화학자가 색의 언어를 만들었다. 로렌스 허버트(Lawrence Herbert)는 인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마주했다. 서울에서 주문한 브로슈어가 도쿄에서 인쇄될 때 정확히 같은 색으로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마다 색을 다르게 느끼고, 업체마다 색을 다르게 표현했던 그 시대에 허버트는 만국 공용어 같은 색상 체계를 구상했다. 팬톤 색상 매칭 시스템(Pantone Matching System, PMS)의 탄생은 단순한 비즈니스 솔루션을 넘어 세계 산업 전반의 언어를 바꾸는 혁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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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인쇄소에서 피어난 색의 꿈

1950년대, 뉴저지의 작은 인쇄 회사는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멜빈과 제시 리바인 형제가 세운 M&J 리바인 광고사는 인쇄 사업만으로는 이윤을 남길 수 없었다. 1956년 형제들은 호프스트라 대학을 갓 졸업한 화학 전공자를 파트타임 직원으로 고용했다. 그가 바로 로렌스 허버트였다. 허버트는 회사의 안료 재고와 컬러 잉크 생산을 화학 지식으로 체계화했다. 이것이 회사의 인쇄 부문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더 이상 색상을 무작정 섞고 시행착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비율로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쇄 부문은 수익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고 부문은 계속 적자를 기록했다. 5만 달러의 부채가 쌓여갔다.


허버트는 자신의 잉크 시스템과 인쇄를 완벽하게 접목할 아이디어를 품었다. 그 확신이 그를 창업가로 만들었다. 1962년 허버트는 리바인 형제로부터 인쇄 기술과 모든 자산을 사서 그 부채까지 떠안았다. 그렇게 팬톤이 탄생했다. 화학자가 회사를 사고, 색상 문제를 풀겠다는 비전으로 무장한 이 젊은 기업은 다음해 역사를 바꾸는 시스템을 세상에 내놓았다.


색상의 바벨탑을 무너뜨리다

1963년, 로렌스 허버트는 판토네 색상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전까지 그래픽 아트 산업은 색상 표현에 관한 악몽을 계속 겪고 있었다. 뉴욕의 디자이너와 서울의 인쇄소가 같은 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다른 색으로 나타나곤 했다. 색은 상대적이었다. 보는 사람의 눈, 조명의 밝기, 표면의 재질에 따라 모두 달라진다. 인쇄산업은 이 불확실성 때문에 계속해서 샘플을 주고받고 재작업하는 비용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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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의 발상은 단순했지만 혁신적이었다. 색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색을 설명하고 재현하는 표준을 만들 수는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기본 색소 12개를 선정하고 이들의 배합을 통해 수백 개의 색상을 만들었다. 이후 잉크 색을 10개로 단순화하고 각각의 색상에 특정 번호와 이름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PMS 123'이라고 하면 뉴욕이든 서울이든 도쿄든 어디서든 그 정확한 색상을 부채 모양의 표준 컬러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잉크 제조사들은 팬톤의 레시피에 따라 정해진 비율로 색을 섞으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인쇄 색상이 갑자기 서로 통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부채 책에서 만국 언어로

1964년, 팬톤은 '팬톤 색 일람표(Pantone Color Specifier)'를 개발했다. 수백 장의 색상 견본이 들어간 이 책은 설명서이자 사전이자 약속서였다. 디자이너는 책을 펼쳐 자신이 원하는 색을 찾고, 그 번호를 인쇄소에 알렸다. 인쇄소는 그 번호를 보고 지정된 잉크를 그 비율로 섞었다. 색상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번호와 색이 일치했으니까. 이제 '음, 이 파란색 좀 다른데?'라는 논쟁은 '아, PMS 300이 아니군요. 이게 맞는 색입니다'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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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의 표준화는 인쇄 비용을 혁신적으로 낮췄다. 샘플 왕복, 재작업, 폐기 비용이 급격히 감소했다. 브랜드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LG는 팬톤 207C(Coated)로 자신의 색을 정의했고, 스타벅스는 3425C, 삼성은 300C가 자신의 고유한 색상이 되었다. 색상 하나가 브랜드의 얼굴이자 지문이 된 것이다. 업계 전역에서 판토네의 색 번호는 비즈니스 언어가 되어갔다. 일반 대중도 모르게, 세계의 모든 디자이너와 인쇄업체는 팬톤의 번호로 색을 말하기 시작했다.


잉크에서 세계로: 산업의 확대

초기 팬톤 시스템은 인쇄용 잉크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허버트와 팬톤은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 색상이 필요한 모든 산업으로 팬톤 시스템을 확장해나갔다. 1970년대부터 팬톤은 직물, 플라스틱, 페인트, 화면 인쇄용 색상 시스템을 차례로 내놓았다. 각 재질마다 색이 다르게 재현되기 때문에 별도의 가이드가 필요했다. 금속 잉크용 메탈릭 가이드, 파스텔과 네온 색상 가이드, 심지어 코팅 용지와 비코팅 용지용 별도의 색상표까지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 팬톤은 단순한 색상 책 제조사가 아니라 색상 전문 연구소로 변신했다. 1985년 팬톤 색채 연구소(Pantone Color Institute)를 설립했으며, 이후 세계의 색상 트렌드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기관이 되었다. 패션 트렌드를 분석하고, 경제 상황을 색으로 해석하며, 사회 심리를 색깔에 담아내는 일을 시작했다. 색상은 더 이상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색은 시대의 감정이고, 시대정신의 표현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색상 변환

2000년대가 되면서 세상은 급격히 디지털화되어갔다. 인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웹 디자인, 화면 표시용 색상이 필요해졌다. RGB(빨강, 초록, 파랑)로 표현되는 화면 색상과 CMYK(시안, 마젠타, 옐로우, 검정)로 표현되는 인쇄 색상은 다른 원리로 작동했다. 팬톤은 이 간극을 메워야 했다.


2007년 팬톤은 색상 측정 장비 회사인 엑스-라이트(X-Rite Inc.)에 약 1억 8천만 달러에 인수되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전략적 선택이었다. 측정 기술과 색상 표준의 결합은 디지털 시대에 색상을 더 정밀하게 관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팬톤 포뮬러 가이드(색상 샘플책)의 색상을 CMYK 값으로 변환하고, RGB 값으로도 변환할 수 있게 되었다. 색상 번호 하나가 이제는 여러 매체에서 사용 가능한 다중 형식으로 표현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최신 버전의 팬톤 CMYK 가이드는 G7 인쇄 표준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고, 2,868개의 색상을 포함한다. 매년 200개 이상의 새로운 색상이 추가되면서 판토네의 색상 라이브러리는 계속 성장했다. 현재 팬톤 색상은 10,000가지를 넘어섰다.


올해의 컬러, 시대의 맥박을 읽다

2000년부터 팬톤은 '올해의 컬러(Color of the Year)'를 매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선택은 단순한 색상 추천이 아니었다. 전 세계 색상 표준 그룹의 대표들이 유럽의 수도에서 만나 이틀간의 논의 끝에 결정되는 이 색상은 세계 경제, 문화,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어두운 색상들이 선정되었다. 경제 침체와 불안감을 색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스타일과 패션, 건축과 디자인 업계는 팬톤의 올해 색상을 참고해 다음 시즌의 트렌드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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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클라우드 기반의 색상 민주화

오늘날 팬톤은 단순히 색상 책을 파는 회사가 아니다. 2020년대 팬톤은 클라우드 기반의 색상 매칭 솔루션 '팬톤 커넥트(Pantone Connect)'를 제공한다. 웹 브라우저, 스마트폰 앱, Adobe 포토샵 플러그인을 통해 15,000개 이상의 공식 팬톤 색상에 접근할 수 있다. 색상을 검색하고, CMYK로 변환하고, RGB 값으로 추출하며, 색상 팔레트를 저장하고 팀원과 공유할 수 있다.


디지털화는 색상을 더욱 민주화했다. 과거에는 비싼 색상 책을 구입한 전문가들만 표준 색상에 접근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누구나 인터넷만 있으면 팬톤의 색상을 찾고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 스타트업 디자이너도 글로벌 브랜드 수준의 색상 관리를 할 수 있다. 색상의 언어는 더욱 널리 공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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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철학자에서 색의 제국으로

로렌스 허버트가 1962년 팬톤을 인수했을 때, 그것은 부채를 안고 사는 절망적인 거래였다. 그가 생각한 것은 기술적인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것은 그것보다 훨씬 컸다. 팬톤은 색상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색상을 정의하고 기준화할 수 있다는 역설적 진실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색상 번호 하나가 약속이 되고, 그 약속이 수십 억 달러의 비즈니스 신뢰를 만들어냈다.


60년이 지난 오늘, 팬톤의 색상 체계는 인쇄에서 시작해 패션, 건축, 코스메틱, 자동차 산업까지 확산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국기 색상은 팬톤 300으로 정의되고, 미국의 여러 주의 공식 색상도 판토네 번호로 표기된다. 색상의 언어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세계 표준이 되었다.


원래 색상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문제에서 시작한 팬톤의 여정은, 우리가 얼마나 공통된 언어를 원하는지, 얼마나 정확한 소통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색이라는 가장 주관적인 감각을 객관화하려는 이 도전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렌스 허버트의 화학자적 정밀함과 예술적 감수성이 만난 그 자리에서,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 가능하게 변했다. 색상 번호로 말하는 세상. 그것이 팬톤이 만든 아름다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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