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1987년,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출판 산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팀 길(Tim Gill)이 애완용으로 받은 2,000달러로 창립한 쿽 회사(Quark, Inc.)가 선보인 쿽(QuarkXPress)은 탁상출판(DTP, Desktop Publishing) 혁명의 선두 주자였다. 이 소프트웨어는 매킨토시 환경에서 전통적인 인쇄 출판 방식을 컴퓨터 환경으로 옮겨내면서, 출판 산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에게 창의적 자유를 선사했다. 1990년대 전성기에 쿽은 전 세계 출판 시장에서 무려 95%에 달하는 점유율을 자랑하며, 신문사와 잡지사, 인쇄소의 필수 도구로 군림했다.
1989년 XTensions라는 개방형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 도입은 쿽의 가장 영리한 전략이었다. 이를 통해 제3의 개발자들이 자신의 플러그인을 만들 수 있게 함으로써, 수식 편집기부터 다양한 기능들을 갖춘 풍부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당시 애도비 시스템즈(Adobe Systems)가 페이지메이커(PageMaker)로 대항했지만, 쿽의 뛰어난 기능과 확장성 앞에서는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윈도우 3.1용 버전 출시로 플랫폼을 확대했고, 1996년 출시된 3.3 버전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버전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한국 출판업계에서는 이 3.3 버전이 한글에 맞게 개조된 3.3k 버전으로 오랫동안 '최고의 선택'이었다.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 폰트와 트루타입(TrueType) 폰트 모두와 완벽하게 호환되는 능력은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술력이었다.
1990년대 상륙한 쿽은 한국 출판 환경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워드프로세서 중심의 문서 작업에 머물러 있던 국내 출판사들을 위지위그(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방식의 시각적 편집 세계로 이끌었다. 출판사 편집자들은 자신이 생각한 그 모양 그대로 책을 만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처음 경험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3.3k의 성공이 곧 쿽의 한국 시장에서의 고착을 초래했다.
과도한 라이센스 비용을 요구한 쿽 회사에 반발한 인쇄소들은 4.0 버전으로의 업그레이드를 거부했다. 수년에 걸쳐 제작한 편집 파일들이 최신 버전에서 호환되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의 많은 출판사와 인쇄소는 공식 지원이 끝난 후에도 3.3k 버전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기술적 문제가 아닌 경제적, 정책적 실책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1999년 팀 길이 자신의 지분 50%를 CEO였던 프레드 에브라히미(Fred Ebrahimi)에게 약 5억 달러에 매각한 후, 쿽은 운명의 갈림길을 맞이했다. 2002년 쿽의 5 버전 출시 당시 매킨토시 운영체제가 클래식에서 Mac OS X로 대전환했는데, 쿽은 이 변화에 늦게 대응했다. 반면 애도비의 인디자인(InDesign) 2.0은 같은 주에 출시되면서 이미 새로운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2003년 인디자인이 애도비 크리에이티브 슈트(Creative Suite)에 포함되면서, 포토샵(Photoshop)과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를 필요로 하던 디자이너들은 자동으로 인디자인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가격 전략의 실패도 쿽에 치명적이었다. 인디자인 CS가 699달러였을 때, 쿽 6은 945달러라는 더 높은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Mac OS X 환경으로의 산업 전환 과정에서, 세계 탁상출판 시장의 최강자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쿽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회사는 지속적으로 진화해 왔다. 2011년 9 버전은 매킨토드 매거진(MacWorld) 편집상 대상을 수상했다. 2015년부터는 연간 업그레이드 주기를 도입하면서 쿽2015, 쿽2016 같은 새로운 명명 방식을 채택했다. 최근 쿽2025(내부 버전 21.0)는 인공지능 기반의 폰트 페어링, 실시간 맞춤법 검사, 스타일 그룹, 마크다운 언어 지원, 중첩 프로젝트 기능 등을 선보이며 디지털 시대에 발맞추고 있다.
현대의 쿽은 더 이상 시장 지배자가 아니지만, 여전히 특정 워크플로우와 전문가 그룹에 선호되는 소프트웨어로 남아 있다. 특히 고급 조판 기능과 중앙화된 출판 자동화가 필요한 출판사나 인쇄소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7년부터 현재까지 4십여 년간의 여정에서, 쿽은 포스트스크립트와 함께 전통 출판을 디지털 세계로 안내한 선각자였다. 팀 길이라는 한 엔지니어의 창의적 비전이 만들어낸 이 소프트웨어는, 비록 경쟁에서 뒤처졌지만, 출판 산업의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출판 환경을 형성했던 그 3.3k 버전도, 지금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지만, 당시 편집자들에게 선사한 창의적 자유감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기술의 진보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지만, 혁신의 정신만은 다음 세대의 도구에도 이어진다는 것을 쿽의 여정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