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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Jun 20. 2019

술에 미친 여자들

"유비 관우 장비 방 어때?"


뜬금없이 K가 제안했다. 카카오톡 단톡방의 이름을 바꾸자는 거였는데 느닷없이 삼국지가 등장했다. 누가 유비고 관우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장비를 하겠다며 S가 나섰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관우. 다른 이유는 없고 청룡언월도가 멋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온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S가 "언니, 차 아니에요?"라고 되물었다. 망할, 차였던가?


다행히 검색 결과 술임이 밝혀졌고, 술에 미친 여자가 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최종으로 결정 난 단톡방 이름이 '광술녀'였다. 그렇다. 다음 웹툰에서 연재됐던 '술꾼 도시 처녀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광고하면서 술 마시는 여자들'의 약자였는데 어쩐지 술도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광'이 널리 알린다는 뜻의 그 광이 아니라 미쳤다는 의미로 느껴지는 게 아닌가. 술에 미친 여자들, 그런 느낌 말이다. 분명 그때 제정신이었는데 그 마저도 재밌다고, 좋다고 우리는 낄낄거렸다. 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고.


광술녀는 대행사 AE, 아트, 카피로 지금은 각자 다른 회사를 다니지만 한때 같은 회사를 다녔다. 그때만 해도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그저 동갑내기 아트와 카피, 그리고 그 아트와 친한 AE 정도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우리 어떻게 친해졌더라? 뭐 보나 마나 술일 것이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라 늘 주장했고, 일주일에 하루라도 술을 먹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치는 사람들처럼 살았으니 술로 친해지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서로 다니고 있는 회사가 가까워서 툭하면 '점심 회동'이라는 명목으로 만나 김치찌개에 반주를 곁들이거나 육개장과 해장술을 즐겼다. 야근이 잦은 직업이라 언제 퇴근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찮게 셋이 퇴근시간이 비슷하거나 칼퇴라도 하는 날이면 잽싸게 근처로 모였다. 안주야 맛있으면 좋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우리 만남의 목적은 술이니까.


나중에 정말 나중에 집을 사게 되고 여유가 생기면 집 안에 bar를 차리겠노라 선언한 적이 있었다. 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저 좋아하기만 할 뿐이지만, 그만큼 애주가이긴 한 것이다. 그래서 같이 살 사람도 술을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주 앉아 같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 로망이 있달까. 그런 의미에서 '술을 못 마시는 남자'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 아닌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나랑 잘 맞고 좋지만 단 하나,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라면?이라는 극단적인 조건이었다. 광술녀를 비롯, 주변의 다른 친구들 역시 대답은 단호했다. No.Never. 술을 못 마셔서가 아니라 술을 마시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게 대부분의 이유였다. 생각해보니, 그런 대답을 한 사람들 모두 술을 마시기보다는 약간 '마셔대는' 쪽에 가깝긴 하다.


어쨌거나, 이번 주 금요일 또 광술녀와의 모임이 있다. 매번 만나기 전에는 '이번엔 꼭 일찍 가자.' '나 막차 타고 집에 갈 거야' '이번엔 적게 마셔요'라는 부질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하지만 늘 그렇듯 헛된 꿈이 될 거라는 걸 안다.  금요일엔 또 얼마나 술이 맛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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