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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Sep 24. 2019

그깟 잠이 뭐라고

"야. 너 불면증 맞아? 무슨 잠을 그렇게 자냐."

"몰라. 난 너만 보면 졸립더라. 무슨 향수 써?"

"나 향수 안 써."

"아니야 너한테 항상 좋은 냄새나. 이 냄새만 맡으면 잠이 와. 나 서울 와서 한 번도 제대로 자본 적 없거든. 밤에 불 꺼놓으면 가위눌리고 악몽 꾸고 불 켜놓으면 창문으로 누가 들여다보는 것 같고 그래서 잠 안 자고 버텼다? 근데 푹 잘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아."



어느 날부턴가 나는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 곧잘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눈을 떴고,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다 아침 해가 다 뜨고 나서야 선잠에 들었다. 한두 번 정도 깨는 건 기본이었고 많게는 서너 번씩 눈을 떴다.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토록 자주 일어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반복된 패턴 덕분에 이제는 불면이 익숙하다. 다시 잠들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일도 없다.


어릴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땐 수학시험을 치르고 온 날이면 늘 기절한 듯 잠을 잤다. 수학이라는 세계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터라(지금도 마찬가지다) 시험 점수는 매번 기대 이하였다. 다른 과목에 비해 형편없었던 점수를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괴로웠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게 잠이었다. 수학과 점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는데,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일단 자고 일어나면 알게 뭐야, 그딴 건 다 잊어버리게 됐다. 그때는 그랬다.


어쩌면 불면은 연애와 함께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불안한 연애를 할 때 그랬다. 불안해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도, 그 남자가 변할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다. 그때의 나는 한없이 불안했고 끝없이 초조했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고, 다른 연애를 하게 되면서 불안이 없어졌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크기와 무게만 다를 뿐, 나의 연애에 불안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불면은 점점 더 심해졌다. 서울에서 잠을 편하게 자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면서 "아우~ 잘 잤다!" 하는 장면 같은 건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음 날 있을 회의와 PT에 대한 걱정을 베개 대신 끌어안고 자기 일쑤였다. 불면이 최고조에 이른 건 저번 회사에서였다. 화병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CD(팀장)에게 당한 인격모독과 무시, 멸시 때문에 자다가도 번쩍번쩍 눈이 떠졌다. 그리곤 다시 잠을 못 이뤄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을 정도. 그냥 잊어버리면 될 걸, 덮어버리면 될 걸 굳이 그렇게 밤새 되새김질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깟 잠이 뭐라고.


어떻게든 잘 자보겠다고 불면에 좋다는 따뜻한 우유와 격한 운동, 가벼운 스트레칭을 수 없이 했다. 생약 성분의(그 와중에 몸 챙긴다고 좋은 걸로 골랐다) 수면유도제를 먹다가 냄새에 놀란 적도 있고,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수면유도 음료도 여러 번 마셔봤다. 물론 와인이나 보드카 같은 술의 힘을 빌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뿐, 마음의 짐이 생기면 어김없이 불면은 그걸 알아차리고 문을 두드렸다.


결국은, 생각이 문제다. 알고 있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제 생각 좀 그만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생각이 문제다.


영화 <연애의 목적>에서 불면증을 앓던 '홍(강혜정)'은 이상하게도 '유림(박해일)'의 품에서 푹 잠들었다. 그래서 나도 한때 '유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안도감이 생기면 혹시나 잘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 정말 그렇게 될까. 언제 불면증을 앓았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생길까.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 오늘 밤도 어제처럼 내일 밤도 오늘처럼 불면은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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