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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Jun 28. 2019

아무튼, 술

"안 취할 거면 술을 뭐 하러 마셔?"


첫 회사에서 이상한 선배를 봤다. 오후 1시였는지 2시였는지, 아무튼 점심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바로 있던 회의였는데 그 선배 근처에서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설마 했지만 가까이할수록 냄새는 더 독해졌다. 심지어 선배의 얼굴은 발그레했고 약간의 취기가 도는 상태였다. 세상에 마상에! 평일 낮에, 그것도 근무시간에 술을 먹고 일을 하다니! 스물넷, 갓 입사한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장면이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지금, 나도 '선배'가 되었다.


스트레스받는다고 한 잔, 야근을 많이 해서 힘들다고 한 잔, 오랜만에 칼퇴했다고 한 잔, 날이 좋다고 한 잔, 날이 흐리다고 한 잔, 이건 누가 봐도 술안주라고 외치며 한 잔... 이유야 갖다 붙이면 그만이었다. 술을 마셔야 머리가 잘 돌아서 카피가 잘 써지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거라는 또 다른 선배들의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한 몫했다.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니. 덕분에 얼큰하게 반주를 하고 들어와 카피와 기획서를 쓰거나 회의를 한 적도 많았다. 어떤 날은 '당장 내일까지 제안해야 되는 스케줄이 아니지 않아?'라며 누군가 총대를 고, 그럼 지갑과 휴대폰만 들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가 다 같이 사무실에 들어가 아예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와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생긴 주사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일단 노코멘트하겠다.) 그 당시 옆 팀 부장님이 내 SNS만 봐도 취할 것 같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여전히 일하고 여전히 마시고 사는 걸 보니 다행이다 싶다. 아 쓰고 보니 갑자기 반성하게 되네.


만약 지금까지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에 술을 안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 역시 나를 그때 그 이상한 선배나 동료쯤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다행히 그들 모두 술을 좋아했고, 술자리를 좋아했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라는 말은 접두사였고, 안 취할 거면 술을 뭐하러 마시냐는 말은 접미사였다.


그래서 이런 책도 선물 받았나 보다. 팀원 중 하나가 갑자기 쓰윽 뭔가를 들이밀길래 뭔가 했더니 선물이란다. 제목을 보자마자 내 생각이 나서 샀다고. 광고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포지셔닝인데, 나는 정말이지 술로 제대로 포지셔닝된 것 같다. 그래, 뭐라도 하나 제대로 됐으면 됐지 싶다.  


책 표지에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적혀있는데, 친구들 역시 그 말은 내게 해당이 안 된단다. 나에게 어제의 술은 어제일 뿐이며, 오늘의 술은 또 별개의 문제라고. 그렇게 어제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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