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ldred Jun 28. 2019

꽃이 피면 너를 잊겠다

"그렇게 늦게 까지 일하고 퇴근하면 위험하지 않아요?"           


내 마음을 흔든 건 한 마디였다. 이 일을 하면서 피곤하겠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위험하겠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래 맞다. 나도 여잔데 새벽에 퇴근하면 위험할 수도 있지. 택시기사가 추파를 던질 수도 있고 술 취한 사람이 말을 걸거나 뒤따라올 수도 있고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해치려고 할 수도 있고.  물론 그런 마음을 먹기엔 내가 쉽게 도전할만한 타깃이 아니지만, 아무튼 왜 그런 생각은 못 했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와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 이유가 컸다.                                    


연하는 처음이었다. 아니, 그와는 많은 것들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에는 낯부끄러워 이름 붙이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끼게 해 준 것도 처음, 남자 친구의 친구를 본 것도 처음, 결혼을 생각것도 처음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꽤 많은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남자 친구와 싸운 것도 처음이었다. 이전 관계에서 나는 늘 쏘아붙이기 바빴고 그럴수록 상대방은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내 없는 메아리로만 돌아왔고, 싸우려 들어도 그들은 동굴로만 피해 다녔다. 그런데 그는 나와 같이 싸웠다. '이건 아니다. 그건 오해다. 그래서 그랬다.' 등등 침묵보다는 대화를 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 생긴 마음고생도 처음이었다. 한 성질 하는 나와 맞서서 싸우는 남자라니.


어느 날 저녁, 그는 갑자기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회사의, 아니 정확하게는 사장의 부당한 행동을 못 견디겠다는 게 이유였다. 직장인 중에 좋아서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볼꼴 못 볼꼴 다 봐가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아침마다 출근하게 되는 게 직장인들 아니었나. 어쨌거나 그는 갑자기 그렇게 그만둬 버렸고 나에게 통보했다. 당황했다. 거기까지였다. 아내도 아니고 기껏 여자 친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래? 이유가 있겠지 잘했어 그래도 다음엔 미리 얘기 좀 해주라'였다.


는 금방 다른 일을 구했다. 어느 높으신 분의 수행기사였다. 그는 경호학과를 나와서 석사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경호원 일을 한 적도 있는 그는, 5분 대기조처럼 사는 삶이 싫어 교수가 되겠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수행기사라니. 그는 한 번 나에게 통보하면서 연락이 좀 힘들어질 거라고 덧붙였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어느 날, 그는 벚꽃이 만개한 길을 찍어 보냈다. 높은 분을 모시고 간 곳에서 그분을 기다리며 찍어 보낸 사진이었다.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이라 관리가 잘 되어있다고 했다.  분명 예쁜 길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받고 씁쓸했다. 왠지 모를, 뭐라 말로 설명 못 할 그런 기분이었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그의 미래에 내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 교수를 하고 시의원을 하겠다는 그의 거대한 인생계획 안에 나는 없다는 걸. 나는 내 직업까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란하던 중이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거란 걸.


그와 함께 한 마지막 봄이었다.


그와 만나기 훨씬 전, 이별 후유증을 겪을 때 누군가 그랬다. 상대방과 함께 했던 시간만큼, 딱 그만큼 시간이 지나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급하게 마음먹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벌써 헤어진 후로 몇 번의 봄이 지나고, 벚꽃이 수없이 다시 피고 질 때까지도 곧잘 그를 떠올리는 나는 뭐란 말인가. '그만 잊어야지, 이제는 지워야지,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꽃이든 다시 피면 그를 떠올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꽃이 피면 당신을 잊겠다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봄에 그 시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한여름을 둔 지금까지 이 모양 이 꼴이다. 여전히 닮은 사람을 보면 놀라고 사소한 물건들로 그때를 떠올린다. 이렇게 오래도록 누군가를 잊지 못한 적이 없는데, 마지막까지도 그는 또 '처음'이다.


꽃이 피면 너를 잊겠다 - 한옥순


꽃이 피면
잊어야겠다

사방천지 흐드러진 꽃에 홀려
혼이라도 빠진다면
그때엔
너를 잊을 수도 있겠다

청춘의 빛으로 물든 꽃을 보면서
젊은 날 내 흰 치맛자락에
치자 꽃물로 물들던 너를
기어이 잊어내고야 말겠다

모진 겨울 다 이겨냈는데
모진 네 생각쯤이야
못 이기겠느냐
못 이겨내겠느냐 말이다

꽃이 피면,
꽃을 꺾어 놀다 보면
꽃이 지듯
나도 너를 반쯤이야 잊어가질 않겠느냐

청춘아, 붉디붉던 내 청춘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