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 이야기...
중학교 졸업 선물로 아주 두꺼운 볼펜을 하나 받았습니다.
당시 0.5 제도 샤프를 즐겨 사용하던 저에게는, 글도 두껍고 쥐기도 불편한 그 볼펜은 그냥 애물단지였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책상 서랍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필기도구가 없어서 몇 년 방치되었던 그 넘으로 잠시 메모를 했습니다.
잘 나오기는 하지만, 역시 제 손에는 안 맞았습니다.
이후 녀석은 제방의 이곳저곳을 여행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은 광활한 침대 밑 뿌연 먼지의 사막을 횡단하고, 어느 날은 잡동사니 가득한 TV 탁자 밑 정글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또 방 한 귀퉁이에서 쉬기도 했고, 제방의 최고봉 책상을 2~3번쯤 정복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전 커피전문점에 들렸다가 우연히 명품 관련 잡지를 보게 됩니다.
시계 좋아 보이네... 얼마나 할까?
저 반지 짱 비싸다는데... 여친이 사달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건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 뭐 이리 비싸?
등.. 등.. 등..
그런데, 명품이라고, 귀하다고, 비싸다고 하는데, 제 눈에 익숙한 마크가 보이는 것입니다.
무슨 산의 만년설을 형상화했다나요? 그 하얀 눈 같은 마크가.. 저와 인연도 없어 보이는 '명품'이라는 제품이... 왜 저에게 익숙한 걸까요?
정말..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책상을 4~5번쯤 정복을 하고, 어딘가의 밀림이나 사막을 향해 떠난 그 '뚱! 땡! 이!' 볼펜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그 넘도 헤어스탈이 저 '명품'이라는 넘과 닮아 있었습니다.
네... 그 넘은... 아니 그분의 이름은 몽블랑이습니다.
귀한 집 자식이 어느 날 근본 없는 집안에 입양되어 진짜 천대받으면서 살아가게 된 거죠. 근 십 년 동안...
갑자기 약속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더군요. 그래도,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그날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분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습니다.
책상 위의 책은 얼마 전에 보기는 했지만 어디로 떠났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침대 위 베개는 본지 한참 지났다고... 이미 그 발자국은 먼지 사막의 세월이 감추어버렸다고... TV 리모컨은 얼마 전 TV 받침대 밀림을 향하는 뒷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TV 받침대... 각종 잡동사니의 밀림 속에서.... '몽블랑' 그분을 만났습니다
천성이 고귀하신 분인지라... 그 거친 10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 자태를 잃지 않고 있으셨던 그분. 하지만 10년의 거친 삶을 대변해 주듯, 처음에는 제 얼굴조차 비출 것 같던 그 맑던 피부가, 이제는 여기저기 잔기스가 보이고, 금장에는 먼지가 늘어 붙어 힘겨워 보이더군요.
전 인터넷을 통해 그분의 가치 성분을 조사해봤습니다. 무려... 26만 얼마.... 십 년 전에는 얼마나 잘 나가던 분이셨을까... ㅠㅠ
지금 그분은 제 곁에 없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지 얼마 후, 금융권에 다니던 친구에게 '나보다는 너에게 더 어울리겠다'라며 입양시켰습니다. 지금 그분은 그 아이의 양복 속 주머니에서 자신의 역할을 십분 발휘하고 있으시다고 하는군요.
십여 년을 그렇게 방치했던... 저의 무지를... 이 자리에서 사과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몽블랑'.... 그곳에서는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