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글을 쓴다는 쾌감
나는 타고난 악필이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
당연히 문방구도 좋아한다. 덕분에 PDA(스마트폰이 아니다)를 만나기 전까지는 새해가 시작되면 시스템 다이어리를 사는 게 연례행사였다.
그. 러. 나. 다이어리를 잘 사용한 적은 없다. 좋다는 제품은 대부분 구매했었지만, 내 손에 딱 붙는 다이어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휴대성의 문제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프랭클린 플래너는 사이즈별로 구매했다. 하지만 역시나 실패였다.
휴대성이나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었다. 라이프 스타일의 문제였다.
나에게 있어 일정 관리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지만, 다이어리의 사용에 있어서는 부가적인 부분이었다. 스케줄은 12장이면 충분 했고, 메모나 회의 내용을 적을 수 있는 프리노트를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시스템 다이어리는 대부분을 스케줄로 꽉 채웠고, 정작 중요한 프리노트는 조금밖에 없었다. 내 라이프 스타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두 번째는 종이의 질이었다. 비싼 시스템 다이어리일수록 빳빳하고 코팅된 질 좋은 종이를 사용하는데, 그 질이라는 게 필기감을 담보하지 못했다. 더욱이 난 만년필이나 수성펜을 주로 사용하는데, 대부분의 질 좋은 종이들은 잉크를 쉽게 흡수하지 못해 번졌고, 잉크가 잘 먹는 종이는 뒤로 베어 나와 뒷장을 버려놨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소소한 문제가 겹치면서 난 시스템 다이어리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PDA를 통해 PIMS를 알게 되었고, 스마트폰으로 넘어오면서 google 캘린더를 통해 더 쉽게 일정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제는 시스템 다이어리보다는 가벼운 노트를 선호하게 되었고, 더 이상 규격이나 호환성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펜과 종이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필기구에 대한 나의 갈망이 사라진건 아니었다. 아니, 자유도가 높아진 만큼 더 많은 펜과 종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필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손글씨의 손맛을 좌우하는 건 펜만이 아니다. 4WD가 오프로드를 만났을 때 최강의 드라이빙 경험을 제공하는 것처럼, 펜은 그 펜과 어울리는 종이를 만났을 때 최고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덕후가 그러하듯, 최고의 손맛을 경함 한 사람은 그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한다. 나 역시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고급지(紙)와 그 고급지에 글을 쓰면서 느꼈던 오르가슴을 쉽게 잊지 못했다. 이 경험은 나를 문방구 패티시로 만들었고, 덕분에 난 교보문고라 쓰고 펜시점이라 읽는 거대한 문방구의 노예가 되었다.
그렇게 변태가 된 나는 새로운 펜이 나오면 꼭 한 번씩 테스트를 해봐야 했고, 탐나는 종이가 있으면 반드시 사용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런 문방구 편력 덕분에 각종 다이어리 메이커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 내 뇌리에 각인된 기업이 오롬이다.
이 회사 제품의 퀄리티를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만드는 제조기업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니까.
오롬이 대단하건 제품의 퀄리티뿐만 아니라 판매 이후의 A/S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는 거다.
다이어리 제품을 A/S 한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상담을 받다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제품에 대한 이해가 높은 지를 알 수 있다. 가죽의 특징과 A/S를 진행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그 문제점을 위한 최선의 대안 등... 난 몇만 원짜리 제품을 판매하면서 이렇게 높은 수준의 A/S 퀄리티를 유지하는 기업을 아직 만니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다이어리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난 주저 없이 오롬을 추천한다. (오롬은 나의 이런 애정을 모르겠지....)
한지노트는 그 오롬에서 나온 제품이다.
최근에 내가 접한 한지 관련 상품들은 대부분이 공예품이었다. 그래서 처음 한지제품이 나왔다고 했을 때, 표지를 한지로 장식한 제품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성급한 판단이었다. 이 제품은 표지는 물론이고 내지까지도 모두가 한지였다.
표지는 하드커버에 한지를 입혔는데, 가공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종이가 굉장히 고급스럽다. 아주 거칠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밋밋하지도 않다. 언뜻 보면 한지라는 걸 모를 정도로 가공을 잘했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워터마크처럼 배열된 한지 특유의 닥나무 섬유가 디자인적인 완성도까지 높였다.
내지도 모두 한지로 구성했는데, 한 장만 들어 불빛에 비춰보면 다른 종이에서 볼 수 없는 나무의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내지는 약간 두껍다. 미도리보다 두꺼운 건 당연하고, 조금 두터운 느낌의 복면사과보다도 두껍다. 이건 한지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몰스킨을 사용한 게 넘 오래전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몰스킨 노트의 내지와 비슷한 두께였던 것 같다.
잉크는 잘 먹는다. f촉 만년필로 테스트했을 때, 내가 주로 사용하는 미도리 노트보다 빠르게 잉크를 흡수했다. 물론 뒤로 베이지 않는다.
글을 써보면 한지 특유의 질감이 펜에 그대로 전달돼 약간 거칠다는 느낌을 준다. 빠른 필기보다는 연애편지를 쓰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글을 써가면 한지 노트만의 기분 좋은 필기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 같은 변태가 세상에 많은 것도 아니고, 일반인들에게는 이런 종이의 미묘한 질감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롬은 줄타기를 잘했다. 나 같은 변태를 위해서 종이 퀄리티를 높이는 것은 물론,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보는 즐거움, 즉 펜시용품이 반드시 갖춰야 할 디자인적 요소까지도 잘 구현했다.
이 노트에 글을 쓰다가 문득 '배를 엮다'라는 일본 소설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사전 편찬'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안에 종이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사전을 넘길 때의 느낌, 손가락으로 넘길 때 두장씩 넘겨지지 않고, 사전을 넘기는 손맛을 유지하는 질감까지 따지는 깐깐함이 그 소설에 담겨 있다. 놀라운 건 한 제지업체가 그 편집자의 고집에 맞춰 그런 종이를 만들어 온다는 것이다.
오롬의 한지노트가 주는 감동은 그런 사용자 경험이다. 많은 펜시 업체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 디자인에 몰두할 때, 또는 시스템적인 편리성만을 추구할 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을 '종이'에 집중해 그 '질'을 추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롬은 그 길을 갔다. 그리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년필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을, 이제는 그 정체조차 모를 고급지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난 이 노트에서 다시 떠올렸으니까 말이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내지가 단지 이 노트에서 머물지 말고, 오롬의 다른 다이어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내지로도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욕심을 부린다면 복면사과나 미도리와 같은 이제는 범용이라 불리는 노트 사이즈로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지 이 노트 하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가 이 노트가 단종될 때 사라지기에는 이 내지의 퀄리티와 그 퀄리티를 뽑아낸 개발자들의 노력이 너무 아깝기에... 좀 더 오랫동안 널리 사용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