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들』(클레어 데더러, 노지양 옮김, 을유문화사)을 읽고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킨 괴물 예술가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카피를 읽자 강한 호기심과 불길한(?) 예감이 동시에 밀려든다. 우디 앨런, 마이클 잭슨, 마일스 데이비스... 한때 푹 빠졌던 이름들도 있고, 누구나 알 만한 ‘천재’거나(피카소, 헤밍웨이...), 생소한 이름(아나 멘디에타, 밸러리 솔라나스...)도 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진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의 괴물적 면모를 병렬식으로 고발하는 책이려니 짐작했으나... 책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 나의 심중을 건드린다.
내가 사랑한 예술가가 이러저러한 괴물성을 드러냈어요. 그걸 보는 ‘나’는 어떤가요?
캔슬 컬처라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한 찜찜하고 애달픈 어떤 심정을, 글쓴이가 예리하게 끄집어낸 기분.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여기지만 그와 동시에 비난과 지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 경멸하고 징벌하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덫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 누군가를 큰 목소리로 괴물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64쪽)
5년 동안 집필했다는 책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여러 층위의 주제를 풀어내며, 그를 둘러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흥미롭게 잇는다. 여혐주의자 트럼프의 비극적인 첫 당선(책을 읽던 2024년 11월, 그는 또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미투 운동의 확산을 시대 배경으로 깔고서. 세상 심각한 이야기 끝에 웃픈 유머가 번뜩이고(‘악마의 씨’의 저주를 보라) 그러면서도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지만 리뷰를 쓰기가 쉽지 않았는데, 각 챕터마다 곱씹을 만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 때문.
한때 내 영혼을 충만케 했으나 그의 ‘얼룩’으로 방해받는, 그럼에도 여전히 좋아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들, 그 창조자를 향한 절절한 애증의 토로. 윤리의 문제로 간단히 손절할 수만은 없는, 작가와 작품을 한데 묶어 치워 버리기도 둘을 분리하기도 어려운, 윤리와 미학, 그 사이에서 ‘주관적으로’ 치우치는 나의 이야기.
가령 “버려도 되는 장면들 또한 단단하게 빛나는”, 눈부신 영화를 만든 폴란스키. 열세 살 서맨사 게일리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을 한 폴란스키. “이 모순 사이에서 어떻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글쓴이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권위’에 기대는 대신 자기 ‘감정’에 집중하기로 한다.
-나는 생각만으로 이 괴물 남자들의 문제를 풀지 못할 거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풀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권위자에게 기대지 말고 나의 주관적인 반응을 참고하면 어떨까?
폴란스키라는 충격을 지나면 “20세기 가장 위대한 코미디 영화” <애니 홀>의 감독, “관객이 그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친근하고 나약한 사람(이어야 했을) 우디 앨런이 나온다. 나 역시 젊은 시절 그의 영화와, 특히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왜소하고 소심하고 쪼잔하고 안절부절못하고 투덜대는...-를 꽤나 좋아했다. 글쓴이는 자기 삶에서 소중한 존재였던 엄마의 남자친구로 인해 우디와 순이의 사건에 더 격하게,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그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그 감정이야말로 본질적인 게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도덕적 감정을 품고 있다.(43쪽)
우디 앨런의 배신을 지나면 다음 챕터는 ‘얼룩, 마이클 잭슨’이다. 글쓴이의 음악 평론가 친구는 묻는다. 마이클 잭슨의 경우, (아동 성추행 혐의가 드러나기 전인) 잭슨 파이브 음악은 어떨까. 그 자신이 어린 시절 학대와 착취를 겪기도 했고. “얼룩에도 소급이 적용될까.”
-작품과 창작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얼룩을 제거하면 되잖아요. 작품에서 얼룩을 지워 버려요. 하지만 얼룩이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와인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지만 와인이 카펫에 얼마나 넓게 퍼질지를 결정할 수 없다. (67쪽)
‘얼룩’이라는 은유가 인상 깊다. 책을 읽으며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논란을 검색한다. 글쓴이는 2019년 제작된 <리빙 네버랜드>를 바탕으로 글을 썼겠지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니잖아. 나는 자꾸 그의 편으로 기운다. (빌리진이 히트하던) 시절 나와 친구들은 그의 문워크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그의 음악과 퍼포먼스, 잭슨 파이브 시절의 미성과 미친 바이브까지 그 모든 게 내게 얼마나 황홀했던지.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던 음악-추억에는 찜찜한 얼룩이 남았다.
이어지는 항목은 트렌스젠더는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열성적인 포터 키즈들(일부는 트렌스젠더였을)에게 상처를 준 조앤 롤링, 팬덤 문화와 소비의 문제, 객관적 비평이라는 권위의 허상, 광기와 온갖 방종, 폭력, 악마적 충동이 허용되는 듯한 천재(주로 남성)들...
“근육질이고 자유분방하고 여성 편력이 있고 정력적이고 독재적이고 육감적”인, 20세기 천재 예술가의 다음과 같은 이미지는 너무 웃기다.
-피카소, 해변에서 반나체로 검은 눈을 반짝이며 원숭이처럼 움직인다.
-헤밍웨이, 수염과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월척 옆에 서 있다. (사실 이 거대한 물고기는 헤밍웨이가 아니라 다른 남자가 잡은 것이다.) (114쪽)
또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시간의 문제’(시대적 한계라는 면죄부,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지고 있는가), ‘안티 몬스터 나보코프’(정작 롤리타의 내면은 철저히 무시된 문제작 ‘롤리타’), 미스터리한 사고로 죽은 뒤 침묵당한 유색인 여성 예술가 멘디에타...
거기에 워낙 관심 있던 주제, 작가와 모성에 관한 이야기- 챕터 9 ‘나는 괴물인가’/ 10 ‘자녀를 유기한 엄마들-도리스 레싱, 조니 미첼’에 대해서는 삼박사일 수다를 떨 수도 있을 듯.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과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매우 효율적인 방해 요인”이라는 비극에 대해. 그럴진대 부모의 역할보다 예술 쪽으로 무게 추를 옮겨 버린 여성-예술가의 경우, 가령 두 아이를 놔둔 채 막내만 데리고 떠난, 모성에 관한 문제작을 쓴 작가 도리스 레싱, 아이를 낳되 입양을 선택한 록스타 조니 미첼은 괴물일까.
도리스 레싱의 이야기를 듣고 글쓴이는 레싱을 “약간 흐린 눈으로” 본다. “그녀의 냉철한 지성이 아이를 저버린 냉정한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치고 마는 자신을 자각한다. 남성 작가가 아이를 떠나는 건 너무 잦아 거의 주목도 못 받는데. 말하자면 “얼룩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것.
또 밸러리 솔라나스(살인미수)와 실비아 플라스(자살)처럼 “분노와 무력감이라는 작은 금속 이빨”을 과격하게(?) 드러내 강한 존재감을 남긴 이들, 지독한 술꾼이었던 레이몬드 카버(글쓴이도 알콜 의존증을 겪었다고)...
-괴물도 사람이다. 내가 술꾼이 아니었고 술을 끊지 않았다면 그 괴물 안의 인간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291쪽)
술을 끊고 남은 생을 ‘그레이비 소스’라는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카버의 이야기에, 역시 술을 끊게 된 자신의 경험을 보태며 글쓴이는 술회한다.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296쪽)
나는 이 부분이 뭉클하고 오래 남았다. 원자화된 소비자로서의 권리라는 어쩌면 허상보다, 한때 그 작품을 사랑했던 예술가와 나, 우리가 이루어간 빛나던 순간들로 초점은 옮겨진다. ‘괴물 같은 그들’ 대 ‘흠결 없는 나(우리)’가 아니라, 내 안의 괴물성까지 들여다보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유한다.
마지막 챕터는 ‘사랑받는 이들- 마일스 데이비스’다. 여기서 인용된 미美(beauty)에 대한 정의도 인상적인데, 미란 “우리가 좋아해야 하는지 안 하는지에 상관없이 저절로 마음과 몸이 반응하는 것”. 그에 관한 예시로 마일스 데이비스가 소개된다.
내게도 그 이름은 각별하므로, 지면을 더 할애하기로 한다. 모 재즈아카데미 피아노반에 다니던 20대의 어느 시절, 선생님의 열광적인 소개로 마일스 데이비스와 그의 곡 ‘so what’을 접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은 그 놀라운 음악- 단 두 개의 코드로 진행되는, 깊은 바다나 광활한 사막을 떠도는 듯한, 너무나 단순한 멜로디가 내 영혼에 말을 거는 듯한 사려 깊은 연주, 그 ‘쿨한’ 재즈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숱하게 듣고 어설프게 흉내를 냈으나 얼핏 수월해 보이는 애드립, 그 분위기를 조금도 따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에세이 『마일스에게 화나다』를 쓴 흑인 여성 작가 펄 클리지는 <카인드 오브 블루(kind of blue)>(‘so what’이 수록된 명반)와의 첫 만남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자신의 모든 시절 동안 그의 음악을 통해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를 소개한다. 그러고는
-(여성을 학대한) 그를 사랑하다가 미워하다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알면서도 사랑한다. 우리의 관계 또한 성장하면서 변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사랑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310쪽)
한때 줄기차게 듣던 <카인드 오브 블루> 시디는 누군가에게 빌려주어 사라진 채였고, 나는 *튜브를 통해 오랜만에 그의 음악을 듣는다. 그의 음악-연주를 들으며 도취하던 순간들, 피아노반 친구들과 그 충격을 나누며 들뜨던 열기, 어설프게 흉내내며 웃던 서툰 연주가 떠오른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고 (책을 읽기까지 전혀 몰랐던) 그의 얼룩을 인지하면서, 나는 여전히 그의 음악을 사랑한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