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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재의 마지막 수업 1

by 그루비

재재(가명)와는 재작년 6월에 처음 만났다. 모 업체의 독서지도사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원봉사단에도 등록을 했는데, 한 보육원과 연결이 되었다. 당시 3학년이던 재재는 작고 마른 체구에 또렷한 인상으로, 언뜻 눈매가 매서워 보이지만 웃으면 보조개가 패는 게 귀여웠다.


재재는 태권도 학원에서 오느라 하얀(종종 때가 묻은) 태권도복에 낡은 천가방을 달랑거리며 나타났다. 고개를 빠끔 내밀고 씨익 웃거나 가방을 바닥에 냅다 던지고는 문 뒤로 숨기도 했다. 까불까불하고 제멋대로지만 책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아이. 재재의 부모라면 이렇게 당부했을지 모른다.


“선생님, 재재를 꽉 잡아 주세요.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재재에게 까탈스러운 부모는 없었고, 담당 선생님은 편안한 수업을 주문했다(고 기억한다). 때로는 주위를 얼어붙게 만들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할 엄격함이 필요하겠지만, 유능한 교사라면 당근과 채찍을 능란하게 다루어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 아주 혼쭐을 빼놓을 터이지만, 그런 쓰앵님의 카리스마는 애초에 나와 거리가 멀었다. 몸집이 작고 소심한데다 쎈 어른으로 보이기에는 허술한 구석도 (꽤) 많고……. 이런 나의 호락호락함을 아이들은 귀신같이 알아보는 것이다.


재재에게 무언가를 많이 가르친다기보다는 그저 친근한 선생님이 되어주고(“재재야, 고민거리가 있으면 선생님한테 언제든지 말하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이왕이면 재미도 있는 수업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여, 텐션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초3 남아의 코드에 맞는 농담을 건네고자 무던히 애를 썼……으나,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재재와 수업하면서 처음으로 동화 속 흔한 배경-엄마 아빠,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부모가 등장하는 부분을 대충 넘기거나 심상하게 다루려 애썼는데, 재재는 그다지 마음을 두는 눈치는 아니었다. 엄마가 (말 안 듣는 주인공 아이에게) “등짝 스매싱!”을 할 거라며 킬킬거리기도 했다. 재재가 상상하는,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스테레오타입의 엄마일지 몰랐다.


엄마 얼굴을 모르는 재재에게 엄마란 어떤 의미인지, 때때로 엄마라는 존재를 갈구하는지, 상상을 해볼 뿐인지, 학교의 대다수 친구들과 다른 환경이라는 점을 얼마나 의식하는지, 어떤 결핍을 느끼는지, 대수롭지 않은지, 나의 무신경한 연민인지, 늘 명랑한 재재의 속마음은 알 길이 없었다.


상담 선생님은 재재가 종종 화를 못 참을 때가 있다고 했지만, 수업 시간 중의 재재는 까불까불하면서도 잘 참여하고 이해력도 높았다. 눈을 반짝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런저런-때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어디선가 들은 지식을 조잘조잘 떠들었다. 다만 글로써 제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낯 간지러운 표정을 짓고는 개발새발 몇 줄을 채우는 게 고작이었다.


역시 카리스마를 보였어야 했는데. 초반에 야무지게 기선 제압을 했더라면. 녀석이 내게 외경심을 지님으로써 좀더 글쓰기에 진심을 내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글이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이 꼬리를 물어 글이 글을 낳는 재미, 그것이 마침내 짜임새를 갖추어 자기만의 글로 남는 뿌듯함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한동안 글 몇 줄도 안/못 쓰던 내가 이런 소리를 하자니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녀석은 내가 점점 편해지자 몸을 배배 꼬고 장난을 치며 걸핏하면 딴 길로 샜다. 책은 거의 읽어오지 않고(“선생님, 오늘 무슨 책이에요?”) 요리조리 뺀질대느라 (교재의) 문제 하나를 푸는 데도 하세월이니 글쓰기는 더더욱 난망하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눈물을 쏙 빼도록 녀석을 혼내……는 대신 ‘스티커 시상제’를 제안했다. 수업 태도에 따라 스티커를 1~3개 받고 30개를 모으면 선생님에게 선물을 받기로. 재재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뒤로는 아닌 게 아니라 수업 태도가 좋아졌다.

그래 그래. 하면 잘하는 애잖아.

스티커를 위해 얌전히 있느라 유난히 몸을 비트는 날이면 마지막 몇 분은 초성 퀴즈나 빙고, 숫자야구 게임을 했다. (그럼 다시 눈이 반짝거리고 생기가 돌아왔다.) 재재는 숫자야구 게임을 좋아했고 실력이 금세 나와 비등비등해졌다.


한번은 수업 끄트머리에 그림책을 읽어 주었는데 재재가 꽤 좋아해서, 그 뒤로는 자주 그림책을 챙겨 갔다. 『지각 대장 존』, 『백만 번 산 고양이』,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파란 의자』, 『멋진 뼈다귀』, 『선생님은 몬스터』, 『내가 예쁘다고?』, 『적』, 『연이와 버들 도령』, 『여우누이』, 『오싹오싹 당근』 시리즈 등을 녀석과 함께 읽었다. 재재는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은 질문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는 킬킬거리고 내가 무심코 지나친 장면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우리는 그림책을 번갈아 낭독했는데, 녀석은 처음에는 또박또박 읽다가 점차 큰소리로 장난스레 읽거나 알아듣지 못하게 옹알거렸다. 그래도 재재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시간이 좋았다. 녀석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야기에 빠져드는 순간이.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우리 수업은 차츰 안정적인 형태로 다듬어졌지만, 재재는 여전히 글쓰기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글을 쓰고자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멋쩍거나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어떤 계기로 그 문턱만 사뿐히 넘는다면 재미나게 쓸 것만 같은데. 수업을 시작하며 ‘오늘은 어떻게든 꼭 글(다운 글)을 쓰도록’ 하리라 마음먹고, 수업을 마치며 “다음 시간엔 꼭 글을 많이 쓰자”고 재재와 약속하지만, 수업을 하다 보면 어쩐지 녀석에게 말려 종국에는 실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재재가 어느 날, 자기가 쓴 이야기라며 빨간 색종이(!)로 만든, (색종이 크기로) 무려 다섯 쪽 분량의 책(?)을 가져왔다. 제목에는 ‘이무기’가 들어가지만 정작 “발이랑 얼굴이랑 오른쪽 팔만 있는 귀신” 이야기. 첫 장면부터 귀신이 나타날 듯한 분위기가(“00는 밤 12시 44분 44초에 쉬가 마려웠어요.”) 사방팔방 풍기고 우리의 주인공-왜인지 모르지만 쌍둥이인-은 와들와들 떠는데 예상대로 피투성이 귀신이 똭! 나타나자 주인공은 예상대로 깜짝 놀라 달아나는…… 전개지만, 나는 그동안 쓰던 양의 열 배쯤 많은 분량을, 스스로 재미를 느끼며 썼다는 데 진한 감동을 받았다.


“우와, 재밌다. 진짜 으스스한걸. (색종이부터 빨갛고 말이야.) 와아, 감동이야. (그런데 제목에 나온 이무기는 뭐지?) 이렇게 잘 쓰면서 왜 안 쓴 거야? (그런데 왜 쌍둥이인 거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이야기 더 듣고 싶어. 더 써 줘(떡밥을 회수해)…….”


그래. 다음 시간에는 이런 ‘이야기’를 써 보자, 재재야. 귀신이든 이무기든 너만의 기똥찬 이야기를, 웃기고 으스스하고 눈물 나는 이야기를 쓰는 거야!


나는 재재가 흥미를 가질 만한 새로운 수업 방식을 고민하리라 마음먹었지만, 그 뒤로 (자원봉사가 아닌) 정규 수업을 하는 아이들이 늘고 이런저런 일로 신경을 쓰느라 점점 여유가 없어졌다. 재재의 글쓰기 수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늘 다른 일에 밀렸고, 겨우 책과 교재만 훑고 허겁지겁 가는 형편이었다. 00원까지는 교통도 불편했으므로 몹시 피곤하거나 궂은날이면 땡땡이의 유혹에 빠지고는 했다.


그럼에도 재재의 수업을 다른 수업에 비해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지는 있었다. 유능하지는 못해도 성실한, 서투를지언정 다정한 선생님은 되어야지. 아이들은 나의 서투름을 알아채듯이 나의 애정도 단박에 느껴 버리니까, 결국 유능보다는 애정에 더 끌릴 테니까……. 재재야, 너를 향한 선생님의 다정, 아낌없이 가르치고픈 열정만큼은 네게 전해지겠지.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재재가 나와 같은 4월생이고 네 명이 한 방을 쓰며 9시가 취침 시간이라든가, 내가 청소년 남매와 고양이를 키우고 00원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곳에서 산다는 것 등을. 우리의 수업은 어쩌면 꽤 오래갈지도 몰랐다. 일주일에 한 번 안부를 나누고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하)며 계절을 지나고 우리는 나이를 먹겠지. 재재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고 어쩌면 지독한 사춘기를 겪을지도.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의지가 된다면. 우리가 읽은 책이나 글을 통해 네가 위안을 얻는다면. 오글거리지만 그런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대단한 존재는 아닐지라도, 별일이 없는 한 녀석을 지지하는 어른 중 하나로 성실하게 머물러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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