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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재의 마지막 수업 2

by 그루비

이러구러 2024년 한 해가 저물어 갔다. 재재는 그동안 너덜너덜해진 공책 겉장에 스티커를 붙여 30개씩 두 번을 모았다. 처음에는 축구에 빠져서 축구공을, 다음에는 마술에 빠져서 마술용 카드를 선물로 받았다. 다시 30개가 채워질 무렵에는 야구에 빠져 있었다. 재재는 처음에 야구 글러브를 말했다가, 야구에 시들해진 건지 이제까지보다 비싼 선물이라 내 주머니 사정을 헤아린 건지, 그냥 엠앤엠 초코볼이랑 새콤달콤만 왕창 받고 싶다고 했다.


한 해의 마지막 수업 날(크리스마스와 여러 일정이 겹친 탓에 12월 둘째 주에 마무리했다), 나는 재재의 선물을 준비해 갔다. 차마 그 달콤이들만 잔뜩 가져갈 수는 없어서, 고민 끝에 달콤이들 몇 개랑 편의점 카드를 사서 5천 원을 채웠다. 다음에 스티커를 모으면 조금씩 충전해 주는 걸로.


재재는 그럭저럭 선물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말하자면 종강파티 같은 분위기라, 우리는 샛길로 편하게 빠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재는 전주에 일어난 계엄 사태에 대해- 어디선가 들은 거짓 정보까지 곁들여- 열을 내며 떠들었다. 정말 아찔한 시간이었지, 재재야. 우리가 이렇게 독서 수업을 하는 일상이 얼마나 귀한지. 나는 녀석의 질문에 아는 범위 내에서 적당히 답을 해주고는 얼마 전 다른 수업에서 다룬 내용- 대통령과 민주주의, 삼권분립 등에 대해 두서없이(약간 버벅대며) 들려주었다. 재재야, 덕분에 선생님도 공부를 많이 해야겠구나. 내년에는 다양한 책을 많이 읽고 더 열띤 토론을 해보자. 그리고


“내년에는 진짜, 제대로, 글을 쓰는 거다. 그럴 거지?”


나는 녀석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나 물었다.


“네.”


재재는 새콤달콤을 오물거리며 히죽 웃었다. 녀석, 그동안 좀 컸는걸. 벌써 5학년이라니. 이제 숫자야구나 빙고 게임은 시시할 테지. 더 이상 스티커는 필요 없을지도 몰라. 우리는 꽤 익숙해졌고 얼추 합이 맞아 가는 듯해.


“선생님, 다음 주 월요일에 시간 있어요?”


수업을 마칠 즈음 재재가 물었다. 00원 아이들이 그동안 연습한 노래, 춤, 연주 등을 공연하는 ‘00원의 밤’ 행사를 한다고.


“저 세 번이나 나온다요.”


재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와. 그럼 봐야겠는데?”


나는 꼭 참석하겠노라고 재재와 약속했다. 수업 진도는 거의 못 나간 채로 그렇게 편한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며 우리는 수업을 마쳤다.


가는 길에 담당 선생님에게 ‘00원의 밤’에 오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선생님은 고맙다며 초대장을 건넸다. 그러고는


“아, 참. 혹시…… 못 들으셨죠? 재재 얘기.”


선생님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어떤……?”

“실은 친엄마가 재재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해서요……. 그동안 준비 기간을 가졌거든요. 그래서 내년부터 함께 살기로 했어요.”

“아……, 아아……. 그렇구나. 잘된…… 거죠?”

“네. 잘된 거죠.”


선생님은 싱긋 웃었다. 재재에게도 곧 엄마 이야기를 전할 거라고.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재재가 이곳을 나가다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년 수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했는데. 그게 정말 마지막 수업이 될 줄이야.


그렇구나, 그렇구나. 순간적으로 눈물이 어렸는데 이건 좀 오버인 듯해서, 담당 선생님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재재에게 나는 잠깐 스쳐 지나간 많은 선생님 중 하나일 텐데, 머지않아 내 얼굴도 흐릿해지고, 독서 수업이 있었다는 것조차 가물가물해질 텐데.


재재가 살게 될 동네는 우리 집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곳으로, 이름만 들었을 뿐 가본 적은 없었다. 재재는 낯선 동네에서 잘 지낼까? 엄마는 좋은 사람이겠지. 재재는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거기서도 금방 친구를 사귈 거야. 친구들이랑 야구도 하고, 그토록 갖고 싶던 핸드폰으로 브롤스타즈도 마음껏 하겠지. 당장은 서먹하겠지만 엄마와 점점 허물없는 사이가 되고, 지지리 말을 안 듣거나 엉뚱한 사고를 친 끝에 드디어 ‘등짝 스매싱’을 맛볼지도.


한 주가 지나고, 재재와 약속한 대로 ‘00원의 밤’에 참석했다. 강당은 아이들과 인연을 맺은 많은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재재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바짝 굳은 표정으로 무대에 올랐다. 녀석은 대여섯 명과 각각 팀을 이루어 핸드벨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태권 체조를 했다. 서투르지만 틀리지 않고, 아마도 연습한 만큼 충실하게. 나는 녀석의 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고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공연이 끝난 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재재 쪽으로 다가갔다. 재재는 (후원자거나 선생님으로 보이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재재야, 너무 잘했어!”


나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어린이용 ‘00한국사 2’가 담긴 봉투를 재재에게 건넸다. 한국사를 만화로 띄엄띄엄 익힌 재재를 위해 한국사의 흐름을 가볍게 훑고자 사두었던 것인데, 그동안 간간이 1권을 읽으며 조선 초기-단종과 세조까지 나갔는데, 더 이상은 못하게 되었다. 책만 건네기 허전해서 카드도 준비했다. 재재를 응원하는 마음을 최대한 짧고 담백하게 적었다. 재재는 평소처럼 까불거나 농담을 건네지 않았고, (공연 여파로 들뜬 듯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주위는 소란하고 누군가 재재를 찾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재재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 잘 있어!”


재재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엄마 이야기는 들었는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한 번쯤 꿈꾸던 일이었는지, 얼마나 설레는지, 조금은 불안한지, 00원 친구들과 헤어져 많이 슬픈지,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네 마음의 일렁임은 어떤 모양인지…….


너라면 그곳에서도 잘 지내겠지. 수업도 잘 따라가고, 여전히 호기심도 왕성해서 질문도 많을 거고. 재미있는 책을 보면 빠져들겠지. 독서 감상문 과제가 나온다면 삐뚤빼뚤한 글씨로 글을 써낼 테고. 글을 쓰다 문득 내가 했던 말도 기억할까. 내 말은 잊었더라도 그림책의 장면들은 떠오를 테지. 고릴라에 붙잡혀 천장에 매달린 선생님, 백만 번 살다 처음으로 꺼이꺼이 우는 고양이, 연분홍 벚꽃이 흐드러진 봄의 풍경에 넋을 잃은 아이…….


가끔 학교 가는 길이 지겹거나 예쁜 봄꽃을 발견한 어느 날, 그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좋겠구나. 그리하여 언젠가 너만의 기똥찬 이야기, 웃기고 으스스하고 눈물 나는 이야기를 한 줄 한 줄 채워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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