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진행 중인 정지용의 비극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중 일부
고등학교 시절 이 시를 처음 접하고, 저는 가슴이 참 먹먹했습니다. 자식을 결핵으로 잃은 부모가 밤에 별이 비치는 창문을 쓸쓸히 닦고, 또 닦으며 흐느끼는 그 마음이 너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던 1930년에는 이처럼 결핵 판정이 곧 사망선고와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예방접종은커녕 변변한 치료제도 없어 결핵은 조용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질병이었죠. 그런데 대체 결핵이 뭐길래,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일까요?
항생제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항생제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는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흔히들 사용하는 락스라던가 알코올 같은 것들로 소독을 하다 보니 항생제들도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으나, 항생제는 세균을 직접 죽이는 소독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을 합니다. 바로 세균의 생장을 억제하는 방식입니다.
세균들은 무척 빠른 속도로 증식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식중독을 일으키는 비브리오 콜레라(Vibrio cholerae) 균 같은 경우는 대략 1시간마다 수가 2배로 늘어납니다. 그렇기에 음식에 아주 소량이 포함되어있더라도, 몇 시간만 방치하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식중독을 유발하게 되죠. 체내에 들어와서 감염을 일으키는 균들도 영양분이 풍부한 혈액과 인체의 조직을 이용해서 빠른 속도로 증식을 하기에, 인체 내의 면역 시스템으로 감당이 안 되어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균들이 세포분열을 통해 증식을 할 때는 다양한 물질들이 필요합니다. 같은 유전자를 나눠줘야 하니 DNA를 열심히 복제해야만 하고, 세포 내에서 이런저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단백질을 더 만들어야 하며, 외부의 충격에서 보호해주기 위한 세포막과 세포벽도 추가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과정을 저해하면 세균이 더 이상 증식하지 못하겠죠? 그러면 우리 인체 내의 면역 시스템으로도 충분히 처리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세균 수가 감소하고, 감염이 종료될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을 항생제가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핵은 조금 경우가 다릅니다. 결핵균이 아주 고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결핵은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이 인체에 감염됨으로써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입니다. 결핵균이라고 기본적인 침략 공식이 다를 것은 없습니다. 인체 내에 침입해서 우리 몸의 영양분을 토대로 증식하고, 체내의 면역 시스템과 싸워 결국은 몸의 주도권을 빼앗아 버리는 것. 그런데 결핵균은 다른 균과 비교해서 무척이나 느린 균입니다. 앞서 설명드린 콜레라균은 1시간에 수가 2배로 늘어난다고 했었던 것 기억하시나요? 결핵균은 수가 2배로 늘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으면 18시간, 길면 54시간에 달합니다. 다시 말해, 대략적으로 이틀에 한 번씩 세포분열을 한다는 말입니다.
저렇게 느리게 자라면 훨씬 잡기 쉬운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항생제들이 증식 과정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균을 죽이는 것들이라, 되려 저렇게 느린 균에는 별로 효과가 없다는 점입니다. 교통질서 유지를 위해 과속 단속 카메라를 엄청나게 설치해뒀는데, 경운기가 길을 막아버려서 교통체증이 생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셈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차라리 기왕 느리게 증식하는 것, 인체 내의 면역 시스템으로 잡아버리면 처리가 쉬울 것인데 이 악독한 균들은 거기에도 대응법을 갖춰버렸거든요. <남한산성> 같은 사극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장기적으로 농성을 하는 것처럼, 결핵균은 면역세포에 잡아먹히면 아예 방어모드로 전환해서 휴면 상태로 변해버립니다. 그러면 면역 세포가 어찌 공격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포분열도 하지 않는 상태이니 항생제도 잘 듣지 않습니다. 이를 ‘잠복결핵’이라고 하는데, 이 못된 균들은 인체가 약해지면 기회를 틈타 다시 활성 상태로 변해 몸을 잠식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아주 장기적으로, 휴면 상태의 결핵균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항생제를 6개월 이상 투여하는 것이 결핵의 유일한 치료법입니다.
근데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일까 싶으시죠? 실은 무척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한국은 결핵 환자가 무지무지 많은 나라거든요.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결핵환자 수는 3만 6천 명 정도입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지만, 2017년에 새로이 결핵에 감염된 환자가 2만 8천 명입니다. 거의 매일 100명이 새로 결핵에 감염되는 것입니다. 이 자체로도 무척 많은 숫자이지만, 정말 심각한 건 따로 있습니다. 바로 10대 환자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0-14세 까지는 인구 10만 명 당 결핵 발생률이 5.4명 수준이지만 15-19세에는 이 수치가 37.2명으로 치솟으니 문제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이런 상황을 우려해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잠복결핵 검진을 진행하겠다는 정책을 내놨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결핵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집단적으로 반발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기준치를 초과한 중금속이 결핵 백신에서 검출되었다며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식약처 조사 결과로는 쌀밥 한 공기에 들어있는 수준의 미량의 중금속이 포함된 것이라 안전에 크게 문제가 없다고 밝혔는데 말이죠. (비소는 72시간 내에 대부분 오줌으로 배출됩니다) 이런 조치가 시행되지 않는다면 결핵의 피해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는 여러 항생제에 내성을 보이는 다제내성 결핵의 유행까지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결핵이 백신으로 완전히 예방되는 질병은 아니지만, 결핵 백신을 접종하는데도 아직 한국은 결핵의 왕국입니다. 자녀의 고흔 폐혈관이 찢어지던 비극에서 벗어날 길이 있는데도 이를 과장된 위험 때문에 거부하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백신 접종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중요한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