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료보험의 구조
의외로 보건의료인들도 잘 몰라서 자주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긴 하지만 한국에는 민간의료보험이 없습니다. 삼성생명, 교보생명 등등 보험사에 열심히 보험료 내고 계시는 분들은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시겠지만,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한국에는 민간의료보험(private health insurance)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료보험(health insurance)이란 의료 소비자(①)와 의료 공급자(②) 그리고 보험제공자(③) 중 ②와 ③이 급여제공 계약을 맺고, ①과 ③도 보험계약을 맺음으로 인해 성립하거든요. 이렇게만 보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시죠? 이거랑 가장 유사한게 통신사 제휴 서비스입니다.
소비자(①)는 통신사(③)에 통신료를 납부하면서 제휴 서비스 혜택을 제공받는 계약을 합니다. 반대로 통신사(③)는 시장의 다양한 매장(②)과 제휴 서비스 제공 계약을 채결하지요. 그래서 SKT고객인 저는 SKT와 계약된 A 커피점에서는 제휴 할인을 받을 수 있지만, 제휴되지 않는 B 커피점에서는 할인혜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KT 고객인 다른 분은 B 커피점에서는 할인혜택을 받지만 A 커피점에서는 받지 못하죠.
이러한 의료보험 체계에서, 보험제공자(③)가 국가 혹은 공공 재단이면 공공의료보험(public health insurance)이고, 민간단체 혹은 기업이면 민간의료보험(private health insurance)이 됩니다. 보험제공자의 성격에 따라 다른 셈이죠.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의 경우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는 공단이 유일한 보험제공자(③)입니다. 국내에 있는 모든 의료기관(②)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의무적으로 급여계약을 체결해야 하구요. 그래서 한국 국민(①)은 전국 어느 의료기관에 가서 진료를 받아도 건강보험 적용이 됩니다. 공공의료보험이고, 모든 의료기관이 의무가입하게되는 당연지정제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건강보험공단 외에는 다른 의료보험제공자가 없으니, 한국에는 민간의료보험이 존재하지 않는거죠.
그렇다면 앞서의 삼성생명 등의 의료보험 상품은 뭘까요? 이는 의료보험이 아니라 실손보험(contingency insurance)입니다. 보통은 실제로 지출된 의료비를 환급해주는 식인데, 건강보험공단에서 제공해주는 것 외의 일부 자부담 금액을 보장받기 위한 보조적인 보험입니다. 이를 민간의료보험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거죠.
미국 등지에서는 실제로 민간의료보험이 존재하고, 앞서의 통신사 제휴 서비스같이 보험료에 따라 혜택이 다르고 특정 병원에서는 적용이 안되기도 합니다. 공공의료보험이 존재하긴 하지만 인구의 30% 정도만 커버하고 있구요. 그런 것들이 민간의료보험이지, 한국에서의 contingency insurance를 민간의료보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류입니다.
2017년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를 시행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구절이 하나 있더군요. 민간의료보험 지출을 줄여서 가계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표현이 있던데, 아마도 실손보험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들어도 의미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대규모 정책 변화를 예고한 발표인만큼 용어에 있어서는 조금 더 신중하고 엄밀한 주의를 기울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