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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여행

by 차가운와인

보름 동안의 스페인 여행이 끝나고 인천행 비행기가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막 이륙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어마어마한 피로감이 덮쳐와 의자 깊숙이 나를 밀어 넣었다. 쌓여있던 피로물질이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온몸 구석구석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잠을 청했다. 두 번 제공되는 기내식도 필요 없어 보였다. 비행기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내가 13시간 동안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 늦은 오후 비행기라 금방 어두워져서 잠자기에도 딱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나는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행기 안은 적당히 서늘했고 조명도 여전히 어두웠지만 객실 내부는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2주라는 짧은 여행에서 내가 받은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는 '유럽 속의 중국' 같은 느낌이었다. 겨우 2주니까 제대로 알 순 없겠지만 어쨌든 내 느낌은 그랬다. 다소 무례하고, 배려가 부족하고, 떠들썩하다.


객실의 웅성거림은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여느 스페인 거리 레스토랑마다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친구들과, 동료들과 떠들고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로 꽉 찬 타파스처럼 그들은 승무원들로부터 건네받은 와인잔을 한 손에 들고 조금 공간이 여유로운 비상구석 쪽에 둥글게 모여 서서 피로 게이지가 만 오천 피트 상공까지 올라 찬 사람들을 아랑곳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승무원을 붙잡고 저 사람들 왜 저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승무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스페인 사람들 원래 저래요"


나는 짜증 내기를 관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냥 기내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기내식이 제공되고 나면 저 스페중국인들도 분명 지쳐 잠이 들것이고 그때 눈을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기내식을 기다리며 이 깊은 피로감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나는 왜 여행을 다니는가' 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낯선 공간, 낯선 시간,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익숙지 않은 음식과 익숙지 않은 문화, 익숙지 않은 언어를 극복해가며 나는 왜 멀리 떠나있는가.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나를 재충전하기 위해서, 와 같은 진부한 대답이 얼핏 떠올랐지만 정답은 아니다. 대개 정답을 찾기 힘든 질문들은 애초에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같이 왜 나는 여행을 떠나는가 하는 것도 그럴 것이다.


원래 유명했는지 몰라도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세를 치른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라는 책이 택배로 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이때까지 접한 김영하 작가의 책들은 그랬다. 초반에 끌고 가는 무지막지한 힘에 비해 끝이 좀 약한 느낌. 그렇지만 '여행의 이유'는 적당한 힘으로 끝까지 나를 밀어붙였다. 간단히 끝내고 그 끝은 간단치 않은 책이다.


김영하는 '왜 나는 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얼핏 떠올랐던 진부한 정답과는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하고 동의했고 박수쳤다.

우리는 대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잠시라도 현실을 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과거와 미래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그 양극단을 반복해서 오가는 왕복선 문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손잡이를 잡고 지나쳐가는 바깥의 현실 풍경을 바라보며 언제고 뛰어내리길 바라는 삶.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현실을 사는 순간보다 예전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를 반복하며 과거에 사는 순간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떡하지, 나중에 저런 일이 벌어져 지금의 안락함이 깨지면 어떡하지를 반복하며 미래를 사는 순간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그녀들에게 매일 편지를 쓰고 보험을 다섯 개나 넣고 있는 걸까.)


현실을 살기 위해 - 어쩌면 - 우리는 떠나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 익숙지 않은 곳으로. 이런 아이러니가 그 정체불명의 피로감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일까.


나는 지난 2019년 6월 2주 동안의 여행일기를 쓰고자 한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순간이 나에게 일어났었던가 싶은 정도다. 여행을 마치고 지난 8개월 동안 왕복선을 타고 오가는 동안 낡아빠진 스티로폼의 둥근 부표가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여행의 기억은 차창 밖 현실의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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