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 마음이 지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원한다면 아무런 의사소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언어가 다른 나라, 아는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는 공간에서 이방인으로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진다. 그래서 눈을 보러 멀리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새하얀 눈을 보며 홀로 낯선 공간에서 떠돌며 생각을 정리할 여유가 필요했다.
이에 이웃 나라의 설국, 홋카이도로 떠나기로 했다. 새하얀 눈이 가득한 그곳. 그중에서도 아기자기한 마을에 귀여운 작은 가게들이 가득한 동네, 오타루를 향해 말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출국 5일 전에 비행기 티켓을 끊어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단 5일의 준비 기간, 여행 준비로 무엇을 해야 할까. 계획형의 사람들은 겨우 5일로 어떻게 여행을 떠날 수 있냐고 묻고는 했다. 그런 짧은 준비 기간에 오히려 반항 심리라도 들었던 걸까, 홋카이도 여행의 준비로 영화 <러브레터>를 봤다.
설원에서 "잘 지내시나요 (오겡키데스카)"를 외치는 여주인공의 모습으로 기억되고는 하는 영화 <러브레터>
새하얀 눈밭에서 “잘 지내시나요(오겡키데스카)”를 외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인 그 영화.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새하얀 눈밭에서 처연하게 소리치는 모습이 수없이 패러디되었던 그 영화. 설국 홋카이도로 떠난다면 꼭 보고픈 영화였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의 인과관계로, 그 영화 덕분에 홋카이도에 가고파 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겨울이 돌아오면 <러브레터>의 OST 'A Winter Story'가 아련하게 떠오르고, 그 겨울의 홋카이도가 그리워진다.
영화 <러브레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촬영지인 홋카이도 오타루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눈 내린 마을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하지만 <러브레터>를 그저 잔잔한 로맨스 영화라고 하기에는 같은 얼굴을 한 두 여주인공, 현재에서 과거로 전환되는 장면과 같은 요소들이 보는 이를 설국에서의 한낮의 꿈속으로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마치 보물 찾기처럼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며 히로코와 이츠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 본 게시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련 하디 아련한 첫사랑이 생각나게끔 만드는 영화 <러브레터>의 포스터
영화의 첫 장면은 눈밭에 누워있는 히로코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겨울 눈밭이 얼마나 추운데 저렇게 누워있을 수 있을까.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눈을 털고 일어서 설원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비추며 <러브레터>는 사람들을 영화 속 세계로 데리고 간다.
남자친구를 떠나보낸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남자친구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 그녀는 남자친구를 그리워하며 그의 졸업앨범에서 발견한 학창 시절 집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지금은 개발로 없어졌다던 집에 보낸 편지로부터 답장이 도착한다. 그것도 죽은 남자친구의 이름으로. 알고 보니 남자친구와 같은 이름을 가진 같은 반 여학생, 이츠키의 주소로 잘못 보냈던 편지. 그렇게 이츠키를 통해 히로코는 자신은 모르던 학창 시절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매우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로 등장하는 히로코와 이츠키는 사실 한 명의 배우가 연기했다.
영화 <러브레터>에는 두 명의 여주인공이 있다. 조용하고 섬세한 성격을 가진 와타나베 히로코는 설산에서 실종된 남자친구를 그리워한다. 엉뚱하고 새침한 성격의 후지이 이츠키는 히로코의 남자친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중학교 시절 동급생이다. 굉장히 다른 성격의 두 캐릭터는 한 명의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으로 연기했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 히로코가 등장하는 추모식 장면 이후 감기에 걸려 등장하는 같은 얼굴의 이츠키는 관객에게 잠시 혼란스러움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는 영화에 있어 중요한 설정이다.
오타루에서 스쳐 지나가는 히로코와 이츠키의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전 남자친구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히로코의 현재로부터 자신도 몰랐던 첫사랑 이야기를 돌아보는 이츠키의 과거로 옮겨간다. 일반적인 이야기라면 여주인공 둘이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날 법도 하다. 하지만 그 아련한 장면을 통해 <러브레터>는 여주인공 두 명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이츠키가 단순한 동명의 같은 반 친구가 아닌, 떠나간 남자친구의 첫사랑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에피소드들을 등장시킨다.
남자친구가 조난당해 실종된 산을 바라보는 히로코
그렇기에 영화 <러브레터> 속 히로코와 이츠키가 주고받는 편지는 둘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 히로코의 편지는 죽은 남자친구를 그리워하는 애절함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편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서 지난 첫사랑을 보고 있었다는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전해준다. 히로코는 자신이 이츠키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모를 불안감 속에서 이츠키에게 학창 시절의 남자친구, 후지이 이츠키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다. 그저 그리운 남자친구에 대한 자신은 모르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겠지만, 그가 자신에게서 이츠키를 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 속에 히로코는 슬픈 진실을 품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다.
사실 히로코는 이츠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실제로 자신이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았다. 편지를 주고받는 이츠키가 자신의 죽은 남자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은 남자친구가 천국에서 보낸 편지라고 믿고 싶었다. 심지어 이츠키는 컴퓨터 타이핑으로 편지를 썼으니,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가능성은 더욱 적었다. 히로코는 후지이 이츠키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히로코에게 있어 이츠키와의 편지는 슬픈 진실을 전해준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히로코는 천천히 후지이 이츠키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남자친구는 더는 이 세상에 없고, 그가 자신에게서 다른 여자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처음 그가 조난된 산을 마주한 히로코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일출을 바라본다. 그곳이 그가 묻혀있을지도 모르는 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눈시울을 붉힌다. 하지만 이내 산을 마주하며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라고 소리친다. 그녀가 보냈던 첫 번째 편지에서와 같이. 아무런 사실을 모른 채 바라보는 산은 아름답다. 자신에게서 다른 이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했던 그와의 사랑이 아름다웠듯이.
후지이 이츠키(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이츠키에게 학창 시절 첫사랑의 나이에 맞는 짓궂은 장난을 치고는 했다.
반면 히로코와의 편지는 이츠키에게 과거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풋풋한 첫사랑을 깨닫고 첫사랑과의 학창 시절을 추억하는 설렘을 가져다준다. 영화 초반, 이츠키에게 도착한 편지를 보며 우체부 친구가 “러브레터?”라고 묻는다. 그때의 그 편지는 ‘러브레터는 무슨, 이름이 같아 잘못 도착한 편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편지를 이어나간 덕분에 이츠키는 후지이 이츠키를 떠올리게 되었고, 히로코의 부탁으로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하고, 그 덕분에 도서부 학생들이 후지이 이츠키가 남긴 도서 카드를 발견해 전달한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츠키가 이츠키에게 보낸 러브레터는 마침내 전달된다.
그래서 영화를 접할수록 남주인공 후지이 이츠키를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는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사람이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연애를 시작한 나쁜 남자라고 봐야 할까. 히로코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작별도 못 하고 조난되어서는 자신에게서 다른 여자를 보고 있던 나쁜 남자다. 하지만 이츠키의 편지로 알게 된 후지이 이츠키는 첫사랑에게 제대로 된 고백도 못한 채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괜히 짓궂은 장난을 치는 귀여운 남학생이다.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본인에게 직접 고백하지 못하고 이츠키를 그린 도서 카드를 숨겨둔 책만 주고 가는 치사한 남자다.
영화 <500일의 썸머>는 영화를 감상하는 회차에 따라 다른 입장에서 그 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고 했던가. 영화 <러브레터>에서는 영화의 전 후반부에 따라 다른 입장에서 후지이 이츠키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이츠키에게 대신 학교 도서관에 반납해 달라고 요청하는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지난겨울 들린 오타루에는 유독 많은 눈이 내렸다. 춥지만, 왠지 모를 포근한 기운이 감도는 날씨. 눈에 소리가 먹혀 조용한 마을에 새하얗게 쌓인 눈을 바라본다. 두꺼운 생크림 위, 슈가 파우더를 뿌린 듯이 뽀송한 눈 어딘가에 지난 기억을 묻어두고 온다. 새하얀 눈과 함께 겨우내 꽁꽁 얼었다 봄과 함께 녹아 사라지기를 바라며. 너무 많이 내린 눈이 채 녹지 못하고 층층이 쌓여 얼었다가도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설원에서 떠나보낸 히로코의 사랑처럼.
영화 <러브레터>는 그 겨울을 떠나보내며 겨울의 끝에서 보아야 할 영화이지만, 그 겨울을 붙잡으며 추억하려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붙잡고자 했던 그것은 겨울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