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쓰지 않게 되었다. 매일 밤 아이들에게 자기 전 "오늘 하루도 행복했니?" 하고 묻던 것도 어느 순간부터 슬며시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냈어?"라는 말로 바꿔서 하고 있다.
'당신은 행복하신가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행복하세요!' 눈길을 돌리기만 해도 넘쳐나는 광고 속에 매일매일 쉽게 접하는 '행복'이라는 단어들. 나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쓰지 않는 그 단어가 무리를 지어 왜 잊고 있냐고 큰일 났다고 압박하는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언제부터였을까
시간을 돌이켜 스무 살의 날들을 떠올려보니 그때의 나는 따로 행복이란 단어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 나의 하루는 하늘 위 구름의 흘러감만 보고 있어도 만족스러웠고, 바람 부는 날이면 온 가득 푸르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맞추어 '안녕!' '안녕!' 경망스럽게 인사한다며 나도 '안녕' 인사를 하고서는 수줍게 달려가곤 했었다. 친구들과 함께 실없는 농담과 의미 없는 질문들로 반나절의 시간을 채워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했고, 실망과 절망,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한 하루 안에서도 음악의 위로 속에 다시 구름을 보는 날로 채워 나갈 수 있었다. 하루하루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나를 채우고 있고, 의미 있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어쩌면 행복이란 단어를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서른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사람이 내게 전해주는 기쁨의 순간, 더불어 눈물과 어떤 좌절감마저도 모든 것이 내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느끼게 해 주었기에, 그 시절 나는 처음으로 서랍 속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온전히 의식하고 조심스럽게 꺼내 매일매일 곱씹었던 것 같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 사람의 향기 속에서 그 단어를 꺼내고는 반질반질 윤기 나게 닦아 보기도 했고, 어색하고 갑갑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그 사람 몰래 나는 그 단어를 꺼내서 행여 먼지가 쌓일까 '호' 불어보기도 했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성큼성큼 서약의 길을 걸을 때도 그 단어는 내 심장의 박동에 맞춰 성큼 커졌다 작아졌다 나를 두드렸고, 그 두근거림을 함께 들으며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때는 정말이지 너무 커져 버린 그 단어가 병원의 모든 공간과 나의 시간도 완전히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마치 그 '행복'이라는 단어가 내가 아는 유일한 느낌인 것처럼.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커다랗게 나를 감싸고 있던 그 '행복'이라는 단어가 홀연히 서랍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 서랍 속에 있기는 한 것일까. 매일 답습하던 출근길을 벗어나 낯선 공원 한편에 자리를 잡는다. 마치 이십 대가 된 것처럼 애써 그때의 자세를 찾아보며 이리저리 누워서 스무 살의 구름을 소환해 보아도. 바람 부는 날 여전히 나에게 '안녕' '안녕' 인사를 하는 잔망스러운 나뭇잎들에 예전처럼 답례해 보아도. 지금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친구들을 기약 없는 약속 아래 겨우 만나 여전히 의미 없는 질문들을 주고받아도.
지금도 서른 살 같은 설레는 향기를 나부끼는 그 사람 곁에서 지긋한 눈길을 보내 보아도.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빠르고 힘차게 뛰는 두 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소중히 쓰다듬어 보아도 그 단어는 이제는 나의 서랍 속이 아닌 저 광고판 위에 단순한 글자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곳에도 이곳에도. 어느 곳에서도.
마흔이 넘은 나는 그렇게 '행복'이란 단어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쓰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너무 소중하다며 자꾸 꺼내고 만지고 하다 보니 못 견디겠다고 도망가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 흔적이 못내 아쉽고 두렵기도 해서 어딘가 아련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 '행복'이란 단어는 스무 살의 나에게는 필요치 않더니 서른 살의 나에게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인 양 머물렀다가 이제 다른 누군가의 삼십 대를 축복하고 채워주기 위해 날아가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마흔이 넘은 나는 누군가에게 그 단어를 양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흔히들 말하는 철이 들고 어른이 된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단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을 날려 보내고 의연하게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그렇게 의연하게 어른으로서 하루하루를 그 단어 없이, 마치 필요 없다는 듯이 채워 나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다시 떠났을 때처럼 홀연히 나타나 나를 온전히 감싸주면서 "잘했어. 참 잘했어." 하며 내 듬성듬성한 머리를 토닥여주지 않을까.
그렇게 사십 대의 나는 괜한 마음에 광고판 위 '행복'이라는 글자 위에 바람이 아닌 바램을 '호'하고 불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