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국 Apr 28. 2020

일을 더디게 배우는 사람

 나는 일을 더디게 배우는 편이다. 같은 출발점에서 학습하고 시작한 사람들보다도 목표한 성취도를 달성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처음 신규 간호사로 일할 때도 더딘 속도로 인해 나에게 인계를 받아야 했었던 근무자는 다 끝내지 못한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같이 일했던 선생님들이 얼마나 인내를 가지고 나를 믿고 기다려 줬는지 다시금 고마움을 느낀다. 지금 일하는 곳에서도 배움이 늦었기에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이 나로 인해 불편감을 겪었다. 일을 더디게 배운다는 것이 게으르거나 무식하다는 뜻은 아니다. 조건이 주어지면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방법이 느리다는 뜻이다. 흔히 일머리가 없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머리가 없으니 나는 배운 그대로 하게 된다. 날 보고 FM대로 한다고 종종 이야기하는 데 일을 할 때 융통성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지침으로 내려온 것을 수행하는 것까지 거짓으로 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한다.

 일을 느리게 배운다는 것이 일을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그에 걸맞게 사고도 많이 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급격하게 실력이 상승한다. 기본적인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흔히 요령이 생기고 일하는 방법을 적용하기 까진 기본적인 베이스가 중요하다. 처음에 빨리 일하는 습관을 들인답시고 기초적인 부분을 무시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턴 답보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본과 기초를 손에 익히고 지침에 대해 자연스럽게 적용하게 되면 기본적인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보다 실력과 속도가 더 빨라진다.

 처음 몇 달간 일도 느리고 사고도 쳤지만, 6개월 이후부터는 속도도 빠르고 특별히 에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손에 익숙해지고 나서부턴 내가 하는 일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들 보다 약 실수도 덜하게 되고 오더 또한 제대로 걸러 낼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속도가 느리고 실수도 많이 했었던 내가 남들보다 더 빠르게 일은 하지만 에러가 없으니 노하우를 물어오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어떠한 환자라도 내가 적용하는 프로토콜은 동일했고 체크 포인트도 같았다. 기본적인 것들을 체크하고 가면 나중에 에러를 낼 일도 없고 그 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일도 없다. 게으르게 앉아있거나 쉬엄쉬엄하는 타입도 아니지만, 그렇게 서둘러서 끝내려고 하지 않아도 검사의 속도가 빨라지게 된 것이다.

 내시경실에 환자가 들어오면서 환자의 생년월일을 묻고, 틀니 여부와 최근 검사 여부를 묻는다. 수면(진정)이 잘 되는 편인지, 현재 불편한 곳이 있는지, 먹고 있는 약에 대해서 간단히 물어본다. 물론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환자 ID를 체크하고 내시경을 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는 마치게 된다. 환자 차트와 EMR엔 내시경 실시 이유와 과거의 상태를 알 수 있지만, 준비하면서 남는 시간에 정보를 얻으면 검사도 수월하고 시술하는 의사도 편하게 시작할 수 있다.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함으로써 닥터는 조금 더 편안히 검사를 진행할 수 있다. 일을 더디게 배우는 점이 강점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더 튼실하고 밀도 있게 배워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신 승리 일 수도 있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사진을 찍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