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속 시원하게 할 수 있는 때가 몇이나 될까? 난 무던히도 주어진 순간을 누리고 피할 수 있는 일들은 피해 가며 살아왔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살자고 다짐했지만 결과는 무기력하게 시간을 버티는 게 전부였다. 인생은 버티는 것이라며 서로 연대하고 공감할 수도 있지만 내 삶에서 가장 근심과 걱정이 없는 순간은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던 시기이다.
10년 전쯤, 아는 동생과 걸어서 김해 봉하 마을까지 간 적이 있었다. 3일차에 봉하 마을에 도착했고 이후에 버스를 타고 집에 오게 된다. 그때는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도 없었고 가다 보니 봉하 마을을 가게 된 것이다. 왜 걸었는지도 모른다. 쓰다 남은 약간의 아르바이트비와 넘치는 체력이 있었고 남는 시간은 많았지만 알뜰하게 쓸 머리는 없던 시절이었다. 하루에 20킬로 이상씩 아스팔트 길을 쉬지 않고 걸었고 잠은 찜질방에서 잤다. 자전거로 서울까지 가는 것이 걷는 것보다는 쉬웠다던 그 동생은 자신 명의의 집을 가지는 것이 현재 목표이다.
걷기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는지 이듬해에 난 부산에서 진주까지 걸어가게 된다. 땅끝마을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돈도 떨어지고 모든 것이 힘들었던 나는 포기하고 부산으로 오게 된다. 여러 가지 기억나는 일들이 많지만 그때 걸었던 4박 5일간의 고생은 말로 할 수가 없다. 군대 훈련과 행군과는 다른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고생이었고 수중의 돈을 아껴가며 써야 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땅끝까지 가는 여정은 지도와 함께 했다. 여정 중간에 가고자 했던 찜질방은 기존 여행자들의 경험과는 다르게 존재하지 않았다. 밀짚모자를 쓰고 걷고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나처럼 걷는 사람들은 서로 파이팅을 외쳐가며 서로를 격려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비가 긋길 기다릴 때 맡았던 여름향기와 팔을 잡아 뜯어먹던 모기떼들과 귀를 흔드는 매미소리까지 오감이 느꼈던 그날의 기억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간 적은 두 번 있다. 학생 때는 정말 돈이 없어서 피시방에서 잠을 자고 빵과 컵라면을 먹으면서 겨우 도착했었다. 하루 만에 간다는 그 루트와 시간을 따라가보려 했지만 총 2박 3일이 걸렸다. 부산에 다시 올 땐 KTX를 탔었는데 2박 3일간 겨우겨우 도착한 거리를 3시간도 안 돼서 도착했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작년 여름휴가 때도 갔다 왔는데 여정을 유튜브로도 만들었고 조회 수도 꽤 나왔었다.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어느 정도 시간에 대한 부담도 없어서였는지 크게 힘들지 않았다. 피시방에서 내 물건을 누군가가 훔쳐 갈까 봐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 점심을 컵라면 하나로 버텨가며 이동했던 대학시절의 고생이 더 기억에 남는다.
마냥 휴가처럼 먹고 싶은 소고기를 먹으며 시내버스를 타고 유람하는 관광은 크게 재밌지 않다. 물론 고생도 하고 여러 가지 추억도 쌓았지만, 20대 초반에 느꼈던 두려움과 설렘, 라면을 사 먹을지 김밥을 추가로 살지를 고민하던 당시의 나를 생각해 보면 고생의 질이 다르다. 가진 것이 없었지만 당당하게 저지를 수 있는 용기와 패기가 있었다. 지금은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아내와 아들도 생겼고 직장도 생겼지만 그때의 설렘은 없다. 환경은 더 좋아지고 가치는 올라갔을지언정 내 몸속에서 솟음 치던 열정은 온데간데없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사소한 걱정과 근심에 잠 못 이루던 20대 초반의 나는 없다. 남들이 보게 될 내 모습을 걱정하며 항상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세상에 내가 중심이라는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눕자마자 피곤함에 잠들어버리는, 주말만 기다리는 직장인이 돼버렸고 월급날이 즐거운 자본주의의 노예가 돼버린 거다. 현실을 알게 되고 철이 들었다는 이유로 세상의 중심을 다른 대상으로 바꾼 거다. 온전히 나를 사랑하고 중요시하던 낭만을 찾아 헤매던 언제나 중2 같았던 나는 사라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과거 보다 더 좋아진 딱 한 가지의 특징은 남들의 시선을 어렸을 때 보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 지금의 환경과 가치를 적용해서 지금보다 주체적인 인생을 꾸려 나갈 것이다. 나를 세상의 중심이자 가장 큰 가치로 여기던 지난 날로 돌아가고자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중2병이라고 치부되고 낭만이라는 표현이 닭살이나 오글거림으로 바뀌게 된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겠다. 우선 자존감 회복부터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