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충분히 사랑했나?

사랑의 특권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늙은 청춘에 고함

by 그랑바쌈

S는 사회생활 시작하면서부터 알고지낸 여자사람 친구다. 성격이 좋아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호감가는 외모 덕에 왕년에 여기저기 남자들로부터 고백도 많이 받았다.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는데, 이런저런 연유로 S는 어느 순간부터 비혼주의를 선언했다.

"결혼생각이 있는거야?"

최근에 사귀는 남자가 생겼다길래 생각이 바뀌었나 싶어 물었다.

"전혀" S는 딱 잘라 말했다. "그냥 지금이 딱 좋아. 이렇게 쭉 갈래"

엄마아빠 집에서 따뜻한 밥 먹으면서 출퇴근하는 것도 좋고, 연하 남친이 자상하게 잘 챙겨줘서 보호받는 기분이 참 따뜻하고 편하단다.

왜 굳이 결혼이란 걸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네가 아직 정신을 못차렸구나. 결혼하고 애를 낳아봐야 인생을 알지. 부모님이 언제까지 따뜻한 밥상 차려주시겠니? 곧 반백살 넘어가는데 그 때도 지고지순한 연하남이 따라붙을거 같으냐..더 늦기 전에 결혼해'


이런 잔소리를 내뱉는 순간 S를 다시 보기 어렵다는 걸 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동치미 국물만 들이켰다.


언젠가부터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나 노래가사가 시시해졌다. 아이를 셋 씩이나 둔 마흔 중반의 가장이 사랑 얘기에 심장이 뛰는 것도 이상하지만, 아직은 이런 변화가 낯설다.

이삼십대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었다. 남녀간에 불타오르는 격정 멜로. 톨스토이 소설 <안나 까렐리나>의 여주인공이 사랑에 목말라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게 만든 위험한 사랑.

에로스 사랑은 상대로 인해 내가 충족되는 사랑이다. 상대의 관심과 손길이 없다면 세상이 무너진다.

와이프와 여전히 에로스를 나누지만, 중년으로 넘어가면서 인생의 초점이 부모의 사랑, 즉 필레오의 사랑으로 옮겨갔다. 젊음을 숭상하는 시대, 많은 초보중년들이 이런 변화를 부끄러워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생의 전환이다. '너의 젊음이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벌은 아니다' 라는 영화 <은교>의 대사처럼 그것은 특별한 이유로 내려지는 상과 벌이 아니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간의 순서다. 연극의 1막 그리고 2막과 같은.


오히려 '필레오'의 사랑은 에로스보다 훨씬 성숙하고 높은 차원의 사랑이다.

내리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점에서 신이 내리는 '아가페' 사랑과 꽤 닮았다.

나는 굶어도 아이 입에 먹을 것 들어가는 걸 보는게 어쩜 그리 행복할까. 자식을 위해 부모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필레오지만 자녀의 부모 사랑은 여전히 에로스다. 보살핌과 챙김을 받는 수동적 사랑이라는 점에서.

부모의 '필레오' 사랑이 위대하지만 그 사랑 역시 자신의 아이에게만 국한된다는 점에서 아가페의 사랑에 감히 비길 수는 없다. 자신의 아이를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절대적인 사랑이 '아가페'다. 창조주가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세상을 구했다는 복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아가페' 이야기다.


안타까웠던 건 S가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필레오의 사랑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던가. 인간이 '필레오'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특권인데.

꼭 부모가 되어야지 필레오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쉽고 보편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에로스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다. 나이듦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절반을 필레오의 사랑으로 살아야 할 숙명을 갖고 태어났다. 목숨보다 소중한 자녀가 있기에 그 아이의 잘됨을 바라며 나의 늙음과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천수를 누리신 할머니께서 임종 직전에 아버지에게 남긴 말씀은 "집에 갈 때 미숫가루 갖고가래이" 였다. 아들이 깜박하고 놓고 갈지 모를 미숫가루가 당신의 죽음보다 먼저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연이 닿지않아 결혼을 못할 수도 있고, 건강상 아이를 못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필레오의 사랑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남수단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생을 마감한 이태석 신부를 보라. 그 분 인생에 필레오의 사랑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효기간 얼마 남지도 않은 에로스 사랑에 취해서, 필레오로 건너갈 수 있는 가장 쉽고 보편적인 기회를 걷어차버린다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이다. 아마 아파트 분양권이라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진 않았겠지.


결혼과 육아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로 정의해버리는 시대의 가벼움이 못내 아쉽다. 아니 개탄스럽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어 태어난 것이 '라이프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듯, 필레오의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가치 그리고 존재의 이유다.


"머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로마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할 때 행렬 뒤에서 외치는 소리다. 지금 아무리 잘 나가도 결국 죽는다는 걸 기억하고 항상 겸손하라는 의미로 자주 인용된다.

나에게 '머멘토 모리'는 '네가 죽기 전에 필레오의 사랑을 충분히 했느냐?'의 질문이다.

내일 죽어도 후회없을 만큼 지난 인생에서 필레오의 사랑을 했던가? 아직 못했다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사랑하라. 기억하라, 인생이란 살아온 시간의 합계가 아니라 베푼 사랑의 크기로 정의된다는 것을.


"먼저 일어날게, 잘 먹었고. 자주 봐"


남자친구한테 전화를 받고는 급히 가방을 챙겨 나가는 S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들릴 듯말듯 속삭였다.

"머멘토 모리"


커버사진 by 그랑바쌈(프랑스 에트르타 해변, 아이는 그랑바쌈네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