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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Dec 30. 2020

아주 오래된 나의 인생영화

라라랜드의 오마주가 된 그 영화, 쉘부르의 우산

개봉했을 때 떠들썩했는데 어쩌다 못 보고 지나가 버린 영화 몇 편쯤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라라랜드>가 내겐 그런 작품 중 하나였다. 촬영지인 LA를 여행할 때도 영화의 장면을 향수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러브어페어>를 보지 않고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찾았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했을까. 전망대에 서자, 약속한 만남을 기다리던  남자주인공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호텔방에서 몇 차례 라라랜드 시청을 시도했지만 가족여행에선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영화평론가도 아닌데 굳이 지나간 영화를 챙겨본다는 게 좀 오버 같지만, 이 영화가 인생영화라고 얘기하는 이십대를 몇 명 만나고 나서는 좀 궁금해졌다. 코로나 성탄이 선물해준 시간 상품권으로 비로소 뒤늦은 숙제를 할 수 있었다.


(라라랜드와 쉘부르의 우산 스토리가 언급됩니다)


영화의 시작은 평범했다. 느닷없이 막힌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차에서 일제히 튀어나와 춤추며 노래하는 게 평범하다고 할 수 없지만 인도 영화에선 또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라. 배우 지망생과 재즈 피아니스트 알바생, 두 청춘남녀가 만나 불타는 사랑을 나눈다.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는 성공을 위해 둘은 잠시 사랑에 쉼표를 찍고 각자의 일에 전념한다. 영원히 너와 함께 할 거라는 약속만 남기고. 만남과 사랑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막으로 전개되고 그다음은 '5년 후'로 장면이 전환된다. 두 사람의 재회는 아주 뜻밖의 공간과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왜 청춘들이 이 영화를 인생영화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인생영화란 뭘까? 이 질문을 받으면 작품성이나 완성도가 높은 영화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꼭 잘 만든 영화가 인생영화가 돼야 할  이유는 없다. 일류 호텔셰프가 만든 고급진 요리는 분명 스페셜하게 맛있겠지만 그걸 인생 음식이라고 하긴 어려울 게다. 거기 내 인생이 담겨있진 않을 테니. 오히려 엄마의 된장찌개가 인생음식답지 않을까. 보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고 눈물 한바가지 쏟아내 영화관 밖을 나와 몇 걸음 못 가서 감동은 증발하고 그 여운이 나의 일상에 한걸음도 스며들지 못하는 영화라면 그냥 '감명 깊게 본 영화'일뿐이다. 인생영화란 말 그대로 인생의 일부가 되어 성장하는 동안 필요한 순간마다 를 위로하고 반추하게 만드는 그런 기묘한 힘을 가진 영화다.


내게도 그런 인생영화가 있다. <쉘부르의 우산> 1963년에 제작된 프랑스 영화다. 2019년에 한국에서 재개봉되기도 했다. 쉘부르의 우산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6학년 즈음이었다. 정확히는 프랑스 원작이 아니라 TV에 방영된 한국 뮤지컬이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본디 뮤지컬 영화인데 내가 본 쉘부르의 우산은 뮤지컬 영화를 극장에서 뮤지컬로 공연한 것을 녹화해서 TV로 틀어 준 것이었다.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박상원 씨가 남자주인공 '기'를 연기했다. 우산가게 딸 쥬네비에브는 자동차 수리공 기와 사랑에 빠진다. 기는 입영통지서를 받고서 군대를 가고 입영 전날 하룻밤으로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된다. 기가 입대한 후 쥬네비에브는 한동안 기를 그리워하지만, 결국 여자의 임신까지도 포용해준  보석상 신사와 결혼해 마을을 떠난다. 버림받은 기는 제대 후 방황하다 마음을 잡고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겨울밤, 고급 자동차 한 대가 기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들어선다. 운전석에서 기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쥬네비에브. 그 옆에는 아이가 타고 있다. 차에선 내린 여자는 기를 향해 묻는다.

Tu vas bien?(잘 지내?)

Très bien (응 잘 지내)

아이를 보겠냐는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그냥 가는 게 좋겠다며 말을 돌린다. 여자가 탄 차가 출발한다. 이 영화의 진정한 엔딩은 다음 장면이다.

장 보러 갔던 기의 아내와 아들이 나타나고 기는 눈길에서 아이와 행복하게 뛰노며 막을 내린다. 마지막 씬에서 흘러나오는 미셸 르그랑의 음악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5학년 때 빈집에서 TV로 본 쉘부르의 우산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나도 의심스럽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참 신기하게도 장면 장면들과 음악이 너무 뇌리와 가슴에 박혀 그때 이후로 이삼십대가 되어서까지 알게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사랑이든 짝사랑이든 감정이 생겨날 때마다 난 쉘부르의 우산 속 '기'로 빙의했고 어김없이 배경음악이 깔렸다.


라라랜드를 보고 난 한동안 먹먹했다. 이런 도플갱어 같은 영화를 보았나! 사랑과 이별, 어색한 재회, 장면 전환, 음악, 엔딩 모든 것이 쉘부르의 우산과 닮았다. 알고 보니, 감독이 쉘부르의 우산에 대한 오마주로 만든 영화란다. 라라랜드에 진한 여운을 느꼈다면 쉘부르의 우산도 보길 바란다.( 넷플릭스에도 있다) 모든 대사가 노래로 되어있어 영화라기보다 긴 음악에 가깝다. 가능하면 불어 공부를 좀 하고서 보면 좋겠다. 감동이 서너 배로 증폭된다. 좀 무리한 요구지만 인생영화는 그런 것이다. 영화 한 편 보려고 외국어 공부까지 서슴지 않는 것. 둘의 마지막 대사를 이해할 정도면 충분하다.

 

그날 밤 나는 아이들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며 집을 나왔다. 겨울이어서 좋았고 몹시 추워서 더 좋았다. 나는 잠깐 동안 '기'가 되어 텅 빈 길을 걸었다. 귀에 뭔가를 꽂지도 않았는데 음악이 흘러나왔다. Tu vas bien? Très b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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