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려나보다
풀 맛으로 느끼는 계절의 들고낢
세종시 신도심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가끔 들르는 석갈비집이 있다. 갈비만 놓고 보면 대단한 맛집은 아니고 무난한 갈비맛이다. 아프리카에서 3년을 보내고 귀국한 지도 반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그집 생각이 났다. 다시 찾은 식당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 채소무침이 그렇게 맛있어."
7년 전 처음 이 식당을 소개해준 지인이 그랬다. '갈빗집에서 웬 채소 타령?'
고기 1인분은 1인분이 아니라는 건 고깃집의 상식. 먹다 보면 고기가 늘 부족하고 추가로 시키다 보면 고깃배가 불러서 속이 더부룩한 상태로 식당을 나오게 된다. 고기가 목구멍까지 차야 멈추는 나쁜 식습관에 위장은 혹사당하기 일쑤다. 이 집 석갈비는 인원수 만큼만 시켜도 부족함이 없다. 고기의 양이 많아서가 아니다. 함께 차려지는 각종 채소반찬 때문이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겉절이는 최고의 식욕 도우미다. 배추, 상추, 무 그리고 잎새가 삐죽삐쭉 이름 모를 갖가지 싱싱하고 풋풋한 풀에서 나오는 기분 좋은 쓴 맛과 간장, 통깨, 참기름의 달고 고소한 양념 맛이 기기 막히게 어우러진다. 죽은 입맛도 살아날 정도다. 쌈채소로 내어온 깻잎과 상추는 아직 흙의 기운을 잃지 않아 이파리 끝까지 생기가 뻗어있다. 고기에 얹어먹는 마늘은 깨물었을 때 아삭하며 깊고 오묘한 향이 입안 가득 확 퍼진다. 물 건너온 마늘 특유의 코가 아리는 매운맛과는 분명 다르다. 고기에 곁들여먹는 파무침은 압권이다. 이 집 파무침엔 파가 조연이다. 주연은 무다. 무를 적당히 얇게 채 썰어 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와 버무린다. 씹었을 때 아삭아삭 터지며 나오는 기분좋은 단맛 때문에 무인지 배인지 헷갈린다. 젓가락으로 한가닥 들어서 눈앞에 대어보고, 코로 가져다 냄새도 맡아보고, 이로 잘근잘근 씹어도 보지만 틀림없는 무다. 양념 맛이 과하지 않아 질리지 않는다.
작은 종지에 담긴 반찬들도 여느 식당처럼 테이블 위 공간만 차지하는 경우가 없다. 제각각의 몫을 한다. 손을 안 댔으면 모를까 한번 맛을 본 것에는 다시 젓가락이 간다. 고추장아찌, 양배추 샐러드, 시레기 나물, 색색가지 화려하지 않아도 하나하나 맛은 기대 이상이다. 이렇게 채소를 무아지경으로 흡입하다 보면 내가 고기를 먹으러 온 건지 채소를 먹으러 온 건지 분간이 안된다. 고기 한 점은 비중으로 따지자면 쌈밥 위에 올라가는 마늘 한 점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
신선채소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은 많지만 이 집의 채소반찬이 특별히 맛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식당홀 통유리창 너머 넓게 펼쳐진 텃밭이다. 이 텃밭이 없었다면 채소들이 과연 같은 맛을 낼 수 있었을까. 눈앞의 텃밭에서 갓 뽑혀 나온 놈들은 바다에서 건져올린 생선회처럼 팔딱거리는 것 같다. 바다의 생선처럼 텃밭 채소는 항상 풍족하다. "채소 좀 더 주세요" 할 때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달라는 만큼 내어준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양을 사 와서 얼마나 조금씩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할 이유가 없으니. 변두리지만 금싸라기 세종시 땅에 건물 대신 이리 넓은 텃밭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식당주인의 경영 철학이 짐작이 간다.
"쌈도 좀 싸서 먹어"
건강을 걱정해서 하는 엄마의 잔소리는 들은 채만채, 채소 맛 모르는 아이들은 부지런히 고기만 집어 입에 넣기 바쁘다. 그 나이에 풀 맛을 알면 아이가 아니지. 아이들이 풀 맛을 알 정도로 자랐을 때도 이런 식당이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배는 충분히 부른데 식탁 위에 남은 풀들이 아까워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마지막 힘을 내어 본다. 상추에 깻잎을 덧대어 파무침을 한 젓가락 얹는다. 남은 겉절이도 싹싹 긁어 보탠다. 쌈장 대신 초절인 파레무침을 살짝 곁들인다. 그 위에 마늘 한 점을 얹고 딱 그 마늘 크기만한 석갈비 한 점을 올려 쌈을 완성한다. 눈은 앞에 펼쳐진 텃밭을 향한다. 푸르름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봄이 오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