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원이는 한 때 꽤나 친한 사이였던 지안(가명)이와 마주치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지안이는 체구는 또래에 비해 왜소하지만 동네 골목대장 같은 존재다. 원이가 지안이를 피하게 된 것은 원이가 다니던 태권도장을 그만두고 합기도로 옮겨가면서부터다. 합기도장은 태권도장 옆 건물인데, 어느 날 흰색 띠를 매고 합기도에서 나오는 원이를 보고 지안이가 놀려댔단다. "고작 흰띠라니" 하며 깔깔댄 것이다. 태권도에선 같은 파란 띠였다. 이후로도 마주치면 그걸로 계속 놀려대는 모양이다. 제법 떨어진 단지에 사는 지안이는 신출귀몰 동네방네 모든 놀이터를 휘젓고다녀서 원이는 집 앞 놀이터를 지날 때조차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눈치를 보곤 했다. 지안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2학년이 되는 첫날이었다. 원이는 지안이와 같은 반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는 응답받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원이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빠, 이건 은혜야 은혜. 난 2반, 지안인 6반이야"
2반과 6반의 거리를 양팔을 쫙 벌려 표현했다.
다행이라는 말보다 '은혜'라는 말에 맘이 더 짠했다.은혜라니..
나도 지안이를 잘 안다. 지난겨울 눈이 펑펑 내린 다음날백색의 세상에서 원이 친구들과 놀아준 적이 있다. 지안이도 그중에 있었다. 이 한 번의 경험으로도 그 아이를 알기엔 충분했다. 지안이는 정말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밖을 싸돌아 다니는 아이였다. 목엔 핸드폰이 걸려있는데, 이건 엄마의 전화를 받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친구들을 불러내는 용도였다. 초등 1학년이 친구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당당하게 요구한다. 친구를 내놓으라고. 안 내어놓으면 집에 쳐들어올 기세다. 노는 모습도 아찔할 정도로 거칠다. 친구를 놀이기구에 태워서 겁에 질릴 정도로 돌려버린다. 어른이 제지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다.
원이는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다. 나처럼 유리 멘탈이다. 쉽게 상처 받는 여린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런 아이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사회생활에서 늘 상처를 받는 쪽이다. 성품은 대체로 타고 난다. 후천적이지 않다. 지안이도 그렇게 길러졌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눈치를 안 보는 아이는 눈치를 좀 보는 쪽으로,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아이는 눈치 안 보게끔 이끌어주는 것이 부모와 학교의 역할이긴 하다.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우리 팀 사무실 옆에 서너 명 앉을 수 있는 작은 창고 같은 회의실이 하나 있다. 잠시 통화도 하고 커피도 한잔 마실 수 있는 모두의 공간이었다. 새로 인턴직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인턴은 매일 두세 시간을 이곳에 들어가 외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영상통화를 했다. 가끔 낮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턴 이 공간은 이 인턴의 사적 공간으로 완전히 사유화되었다. 직원들의 불만이 쌓여갔지만, 안타깝게도 하나같이 '눈치 보는 성품'의 다른 직원들은 그 누구도 이 당당한 인턴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눈치 보지 말자. 당당하게 살자. 나는이런 얘기를 접할 때마다 좀 불편하다. 눈치 보지 말자는 구호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대개 원래부터 눈치를 안 보는 사람인경우가 많다. 눈치보기는 타고난 성품이라, 눈치를 보던 사람이 눈치 보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는 건 어렵다. 반대로 원래 눈치를 안 보던 사람 입장에선 '눈치 보지 말자'라는 구호가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처럼 반가운 것이다. 눈치보기란 본디 주관적인 것이다. 커피 한잔 시키고 종일 카페에 죽치고 앉아 공부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눈치 없는 행동이지만,카페 자리 잡고 나가서 점심까지 먹고 돌아오는 사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눈치를보는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눈치 없는 사람이 더 눈치 없어지기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부익부 빈익빈처럼 눈치보기의 양극화도 심해질 뿐이다. 지독한 층간 소음을 내면서도 "애가 있는데 어쩌라고?" 하며 나라를 구한 듯 당당한 사람과, 아이도 없는데 혹여 아래층에 피해가 될까 죄인처럼 뒤꿈치 들고 조심스레 걷는 사람이 공존하며 살아간다. 내 기준에선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고, 사람에 대한 오해도 있었지만, 선악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란 걸 깨닫고 나서부턴 그러려니 한다. 각자의 생김새나 부의 수준이 그렇듯 '눈치'도 공정함의 잣대를 들이대기 애매하다. 타고난 것이니.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 개인적 행복, 나의 인생이 중요하다고 해도, 눈치 안 보기로 그걸 쟁취하려는 시도는 때론 반사회적이며 이기적이다. 눈치 보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감수하는 게 마땅하다.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눈치는 좀 보고 살자는 얘기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직장상사는 직원 눈치를, 카페를 도서관처럼 쓰는 학생은 카페 사장 눈치를, 담장 넘는 도둑은 그 집 개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눈치 안 보고 할 말 다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하고 살면 이 사회가 아니 이 세상이 제대로 굴러갈까? 북한이 미국 눈치를 안 본다면 당장 전쟁이 터진다 해도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눈치 보는 아이의 부모라 눈치보기를 옹호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해도 좋다. 난 지금보다 더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세상이 더 유토피아적인 세상에가깝다고 생각한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도 그게 유익하다고 확신한다.불의에 맞선 당당함도 아니고, 자신의 쾌락과 행복을 위해 눈치 없이 당당한 것이 그렇게 권장되고 칭송받아야 할 일인가. 눈치 보며 서로 양보하는 모습이 눈치 없는 한 명이 독식하는 것보단 훨씬 정의롭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