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은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날인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이다. 이 날은 스페인을 비롯한 모든 가톨릭 국가에서 종교적으로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매년 11월 1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나를 포함한 근로자들은 소중한 휴식을 선물 받는 날이기도 하다. 만성절의 전야제에서 10월 31일, 핼러윈(Halloween) 데이가 유래되었다.
스페인은 정통 가톨릭 국가인만큼 핼러윈 데이 관련 파티는 아주 적다. 세계에서 축제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인 점을 생각해 보면 핼러윈 파티가 거의 없다는 게 신기하다. 등교 길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핼러윈 파티를 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모습과 몇몇 가게에서 호박, 거미줄, 거미 등으로 허술한 장식을 하는 정도이다. 반면, 스페인의 빵집과 제과점 쇼윈도에는 핼러윈 장식 보다 '작고 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 빵'을 판다는 홍보 포스터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이 빵은 '부뉴엘로스 데 비엔또(Buñuelos de Viento)'라는 작은 슈크림 빵으로, 11월 1일 만성절 때 스페인 사람들이 먹는 빵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석 때 송편을 먹는 것처럼 말이다.
Buñuelos de Viento는 "바람이 들어간 작은 공 모양의 빵"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이름은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바람떡'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의 바람떡은 만드는 과정에서 공기가 차게 되어 바람떡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의 부뉴엘로는 둥근 슈크림빵 모양이 안에 공기가 찬 것처럼 부풀어 보인다고 해서 "바람이 들어간 작은 공 모양의 빵"이라고 부른다. 두 개의 차이라고 한다면, 바람떡은 안에 고명이 꽉 차 있지 않은, 공기 반 고명 반 느낌이라면, 부뉴엘로 안에는 달달한 크림이 빈 공간 없이 꽉 차있다. 스페인 음식은 다소 심심한 간이 주를 이루는 반면, 디저트는 확실하게 단 맛을 보여준다.
부뉴엘로를 입에 넣으면 우리나라 슈크림 빵처럼 빵과 크림이 부드럽게 녹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스페인 부뉴엘로와 우리나라의 슈크림빵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스페인 부뉴엘로는 겉 빵이 더 얇고 질겨서 우리나라의 슈크림 빵처럼 '사르르' 녹는 기분이 아니다. 겉 빵을 적당히 씹어야 넘길 수 있다. 겉 빵을 씹으면 시원한 크림이 입 안에 감미롭게 퍼지면서 달콤한 여운을 남긴다. 빵 안에는 초콜릿 크림, 생크림, 레몬크림, 헤이즐넛 등 다양한 크림을 넣는데, 조금 특이한 크림으로 까베요 데 앙헬(Cabello de Angel)이 있다. 이 크림은 '천사의 머리카락'이라는 뜻으로, 단맛이 나는 호박잼이다. 이름에 걸맞게 투명한 잼을 실처럼 얇게 모양을 만들어 빵 안에 넣는 것이 특징이다. 그 모습이 투명한 머리카락처럼 보여, '천사의 머리카락'이라고 지었다.
단순한 슈크림빵이지만, 먹는 것에 진심인 스페인 사람들은 부뉴엘로에도 킥(kick)을 더해준다. 빵집에 들어가서 부뉴엘로를 보면 슈크림빵의 겉모습이 그냥 둥글둥글하고 소스가 조금 삐져나온 모습이 재미없고 투박해 보인다. 스페인 디저트들은 맛도 맛이지만 시각적 효과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부뉴엘로를 포장하거나 매장에서 먹으면, 손님에게 주기 직전에 새하얀 슈가파우더를 듬뿍 뿌려준다. 이는 겨울에 내리는 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겨울에 눈이 내리는 곳이 많지는 않다. 제빵사들은 이런 시각적 효과를 통해 이제 스페인에도 겨울이 찾아왔고, 연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전달해 주는 것 같다. 부뉴엘로는 10월 중순 경부터 11월 초까지 특히 많이 팔리지만, 크리스마스 전후로도 여러 빵집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라 마요르끼나(La Mallorquina)라는 역사가 오래된 빵집이 있다. 이곳에는 11월 1일 전후로 해서 매일 아침 전통 레시피를 활용해 부뉴엘로를 만드는 맛집으로 유명하다. 1894년에 문을 연 이 빵집은 클래식한 크림부터 과일, 치즈 등 다양한 크림을 넣어 달콤한 부뉴엘로를 판매하고 있다. 나도 이 집에서 11월이 되면 부뉴엘로를 종종 사 먹곤 하는데, 다른 집보다 이 집의 부뉴엘로 가 유독 맛있다. 맛의 비밀을 알고 싶어 조사를 해보니, 맛의 비결은 '밀가루'였다. 스페인에서 품질 좋은 밀가루로 평가받는 Huesca(우에스카) 지역 재료와 신선한 크림을 활용하여 싱싱한 부뉴엘로를 만드는 것이 이 집의 비결이다. 한편, 부뉴엘로를 포장해 가면 예쁜 분홍색 포장지에 싸주는 것도 클래식한 매력을 더해준다. 라 마요르끼나는 스페인의 대표 관광지 솔광장(Puerta del Sol)과 스페인 명품 가게가 많은 살라망카지구(Barrio de Salamanca) 등 관광객들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10월 이후 스페인에 여행하는 분들은 이곳에 들러 다양한 맛의 부뉴엘로를 맛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