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로도 제작된 82년생을 주제로 한 소설처럼 나도 1982년에 태어나 88년도 굴렁쇠 소년을 TV로 볼 때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를 입학했었으며, IMF가 한국경제를 휘몰아치던 상황 속에 고등학교 생활을 하였었다. 학력고사가 아닌 수능세대로 거듭나 과년도 수능 문제집을 6회 정도만 풀었던 것 같다. 만약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과년도 수능 문제를 몇 번이나 더 풀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기도 하고 몇 년 뒤에 교과과정이 새로 바뀌면서 제2외국어도 보게 되었으니 차라리 그때 당시에 수능을 본 게 잘된 것 같기도 하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반에 45~50명 정도가 있었는데 번호가 늘 20번대 초반 혹은 여학생 번호 시작 전으로 배정되었었다. 중학교에서는 ‘가나다’ 순으로 되어 5번대를 넘기지 않았었고 고등학교를 올라가서는 학년초 키순서대로 일렬로 세워 번호를 배정해 40번대 후반을 배정받았었는데 왜 국민학교에서는 ‘가나다’ 순도, 생물학적 성장 속도도 아닌 어중간한 남학생과 여학생 번호의 중간에 배정되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니 내가 82년 1월생이기 때문이었단 걸 훗날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적에는 3월생부터 이듬해 2월생까지가 한 학년으로 배정되어 한 학년이 꾸려졌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는데 전교생 중 한둘 한 학년에 형제자매가 다니는 경우가 있기도 하였다. 6학년 때 나의 짝꿍이었던 외모가 뛰어났던 여학생의 언니, 그 애는 여학생들 중에 달리기를 가장 잘하였었는데 그 애는 우리 옆 옆반이었다. 3월생 언니와 2월생 동생이 88년도에 입학하였던 것이다. 그 자매의 부모님들의 금슬이 오죽 좋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 애의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이 출산하는 병실 혹은 장소에 함께 계시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빠른 년생이란 이유 때문에 대학 신입생 때 합법적으로 흡연과 음주를 못하는 불리함이 있었지만 이미 그전에 비합법적으로 실행되었기에 체감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재수, 정확히는 대학 여름 방학 때부터 수능을 다시 준비했으니 반수를 하고 다른 대학에 들어가면서 빠른 년생이 ‘족보 브레이커’ 또는 ‘개족보’의 발생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군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지금까지 빠른 년생의 비애 아닌 비애를 가지고 사는 운명에 이르렀다.
반수를 하고 들어간 특수목적대학교 해양대학교에서는 48기 선배들과 어찌 보면 같은 학년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선배 중 누군가 몇 년생이냐 물을 때 ‘저는 빠른 82년생...’이라고 말하면 여기는 기수가 먼저라면서 내 기수인 49기로 앉았다 일어나기 49 팩토리 알(49!)을 시키는가 하면 동기들은 어차피 82년생이니 같은 친구해도 되겠다며 동급을 먹으면서 내 인생에 ‘개족보 창시자’라는 새로운 명함이 생기게 되었다.
81년생들과 함께 교육부 정규 교육과정을 다니고 82년생과 빠른 83년생들과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는 구호를 하며 대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지금 나의 친구들은 81년, 82년, 83년생까지가 모이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나를 중심으로 만나게 되면 각각의 친구들이 서로 어색한 사이가 되는 정말 나 하나 때문에 만나는 그런 모임이 되어버린다. 한 번은 81년생 친구 중 한 명이 빠른 81년생과 함께 나오고 나는 빠른 83과 함께 주신(酒神)을 영접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서로 각자의 친구를 소개하고 말을 트며 한껏 취기가 오르는 중 빠른 81년생과 빠른 83년생이 각자의 생년을 알게 되면서 분위기가 싸~해지는 그런 일도 있었다. 빠른 년생 3명이 모이면 아재에 할아버지까지 친구 먹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던 일이었다.
나처럼 빠른 년생은 ‘나이’를 선택하기도 해야 된다. 얼마 전 생일이 지나 태어난 생일이 돌아올 때 1살을 먹는 만 나이 이곳 미국에서는 38이라고 하지만 가~끔 만나는 한인 또는 한국 가족, 친척, 친구들과 연락할 때는 태어날 때 1살로 시작하는 한국식 나이 39에, 학년 나이 40살이 나의 나이다.
이런 빠른 년생도 내가 군에 입대할 즈음인 태어난 2003년생부터는 없어졌다고 하니 개족보 발생지, 족보 브레이커는 2002년생까지가 마지막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