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는 울지 않는다 2화

같은 경험

by 호림

나와 다르게 환생을 하지 않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밑에서 이뤄진 모종의 거래로 환생을 면한 게 분명한- 456413678은 고속 승진하여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회갈색 정장을 차려 입은 그에게서 예전에 알던 이미지를 풍기는 부분이라곤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전생에 골초였던 습관이 남아선지 담배꽁초를 이빨로 물고 심하게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혹은 금방이라도 밭은 가래를 뱉을 사람마냥 얼굴에 구김살을 만들었다.


"이거 말야."

"응?"


내가 되물었다.


"담배 말야.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데, 습관이 무섭단 말야."


나는 편의점 핫바를 입 안에서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공감이 우러나서가 아니라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리액션이었다. 경험상 전생의 기억들은 폭발적으로 생장하는 두뇌의 시냅스 어딘가에 발목 잡히듯 영원히 각인되고 마는 것 같다. 456413678은 불만스럽게 담배꽁초를 비벼 끄면서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데'라는 말을 한번 더 반복했다. 구둣발로 밟은 담배 꽁초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붉은 불씨 한두 개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실 456413678이 실제로 가진 불만은 다른 데 있었다. 얼마 전부터 고민이 생겼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같은 부서의 한 직원이 성희롱으로 상사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아니, 갑오징어를 성추행하는 나누늘보라니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그는 아주 까다로운 문제가 생겼다며 영어로 Delicate라는 단어를 말끝마다 남발하고 있었다. 영어를 남발하는 습관, 그것 역시 잔존한 전생의 습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서에서 대체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를 할 필요성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일'이 그를 감염시킬 치명적인 흑사병이라도 되는 양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흑사병과 성추행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공통점이 Delicate라는 것만은 말쑥한 수트 차림의 그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공통점이었다.


그가 근무처로 복귀한 뒤에 얼마 후 Delicate 했던 그 문제가 잘 처리가 되었노라는 전언이 있었다.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내부고발을 했던 자(갑오징어)를 타부서로 좌천함으로써 일벌백계하여 아주 속 시원하게 해결이 되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서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단 걸 여러 차례 강조하며 주억거렸다. 전생에 줄담배를 펴대서 폐암으로 사망한 인권 운동가였던 456413678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담배 습관 말곤 이미 다른 사람이었고 전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조직 문화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니 아무 맛을 느끼지 못하는 데도 담배를 습관처럼 찾는 건 단지 니코틴의 중독성이 죽은 뒤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 사이에 나 자신은 부친상을 치렀다. 조선시대에 어버이를 여의고 3년상을 치렀는데, 이번 생에선 죽은 가족을 애도할 시간으로 단 5일만이 허락되었다. 빌어먹을. 회사로 복귀를 했고, 일상은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이 똑같이 흘러갔다. 이따금씩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식사자리에서 부모에 대해 푸념하거나 자랑을 늘어놓는 동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억지스러운 공감을 표했지만, 그들과 진심으로 교감이 불가능하리라는 이물감만이 선명해질 뿐이었다. 이 부장 10만원, 김 대리 5만원, 머릿속엔 그들이 낸 조의금이 전생의 잔상처럼 희미하게 따라다녔다.


그 즈음, 기이하게도 나는 456413678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됐다. 노처녀로 잘 알려진 같은 부서의 이 과장이 상사를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이 과장은 잘 웃지 않는데다가 입이 돌출된 편이라서 평상시에도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사람이었다. '요즘 트렌드가 상사 고발인가'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고발이 있기 전에 대대적인 사무실 리모델링이 있었는데 자리 배치 문제로 크게 다투는 일이 있었다. 자세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평소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고발 내용에는 성희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의 문제이고, 당사자들이 해결해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나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기에 관심이 가면서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탕비실이나 휴게실에서 수군대는 소리로 그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을 뿐이다. 456413678번이 들려준 사례와는 다르게 노처녀 이 과장은 부서를 옮기지 않았다. 얼마 후에 그녀의 상사가 대기발령 징계를 받게 되었다는 건 회사 게시판을 통해 알게 됐다. 여러 날 동안 야근이 계속되어 약간은 멍해진 상태에서 참을 수 없는 하품을 입 밖으로 게워내며 게시판을 쳐다봤다. 일순간 대기발령을 받은 사람이 노처녀 이 과장이었던 건 아닌지 반대로 읽은 게 아닐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2년이 지난 후에 이 과장은 더 이상 노처녀로 불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같은 크기로 치밀하게 잘려 있는 편육을 씹고 있을 때 불현듯 환청이 들렸던 듯도 하다. '안녕하세요' 입이 튀어나온 그녀의 여린 목소리. 여러 날 야근을 계속 할 때였다. 노처녀 이 과장이 탕비실에 드나들 때 나는 그녀에게 아무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암묵적으로, 그녀와 인사를 주고 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이 과장은 점점 유령 같은 사람이 되어갔다.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마시며 쫓아야 할 졸음이 성가셔서 그랬던 것일 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머지 동료들도 매한가지 상황이었다. 누구도, 아무도,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노처녀 이 과장은 2년 동안 진급에서 이유없이 누락되었고, 탕비실에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료라곤 일절 없었다. 대기발령 후에 복귀한 상사는 이 과장에게 제대로 된 업무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장례식때와 다르게 호상이라고 말을 하는 이들도 보이지 않았고, 천장에 달린 전등 불빛이 사그라진 것처럼 칠흑같은 침묵이 흘렀다. 장례식의 분위기는 정수기 생수통만큼 무거웠고 누군가는 '왜 고발 같은 걸 해가지고 명을 재촉해...'라고 조그맣게 쑥덕거렸다. 이 장례식 기간에도 언제나처럼 야근의 연속이었고 옥상에서 기지개를 켜며 참을 수 없는 하품을 했다. 입을 쩌억 벌리면 눈물샘 주변 근육도 자극되어 눈물이 찔끔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세상에 없는 노처녀 이 과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눈물이었다.



-3편에서 계속-

월,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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