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는 울지 않는다 3화

개같은 하루

by 호림

그 생애의 기억은 늘 뛰는 것과 연결됐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뛰고 있었다. 길이 가팔라서 단전에서부터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멍멍!"


입에선 욕 대신 짐승의 목소리가 났다.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생물체의 음성이었다.


"형씨, 그 개가 등산을 아주 잘하는구만, 응"


지나가던 사람이 개를, 아니, 나를 흥미진진하다는 듯 관찰하며 진귀한 물건인 양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네, 하룻강아지일 적부터 산을 잘 탔지요."


나는 그만 맥이 탁 풀어졌다. 기진맥진하기 직전인데 산을 잘 탄다고? 그것도 하룻강아지일 때부터? 손이 있다면 분명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을 것이다. 뒷발을 들어서 턱 밑을 박박 긁었다. 내 발은 여기까지밖에 닿지 않는가!


"멍멍!"

"그 놈, 신통하네. 사람 말도 알아듣는 거람? 웃기까지!"


웃어? 누가? 지쳐서 혀를 쭉 빼물고 숨을 헐떡이느라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웃는다고 하다니 참으로 기가 찰 지경이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주저앉아서 혀 끝으로 사타구니를 핥고 있으니, 이번엔 신선이 따로 없다고 '개팔자 상팔자'라며 우스갯소리를 해댄다. 나는 앞발에 얼굴을 묻었는데 볼살이 볼품없이 구겨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너무 목이 말라서 주인이 가져온 물을 헐레벌떡 들이켜니 부지깽이가 날아들었다. 주인이 마실 몫을 먼저 가로채니 아주 고약한 놈이란다. 단말마처럼 깨갱거리며 기가 팍 죽어서 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어 웅크렸다. 한참 동안 완만한 데크길을 걸은 후에 돌계단으로 된 길이 계속 이어졌다. 아마도 어느 사찰로 연결된 길인 것 같았다. 하룻강아지때부터 오른 산이니, 이런 눈치쯤은 빠삭하다.


"안녕하세요. 이 개가 그 개죠?"


묘령의 여자가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 주인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김모나 PD님이세요?"

"네, 연락드렸던 김모나입니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에 곧장 나를 저울에 올린 핏기가 도는 지방 낀 고깃덩이처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주인이라는 이 작자가 결국 나를...!'


털이 삐쭉 서는 걸 느끼면서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가방을 여네(침 꼴깍), 검은색 연장을 꺼내네(침 꼴깍), 도마를 꺼내네(침 꼴깍),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튀려는 순간 가방 속에서 꺼낸 연장들은 합쳐져서 카메라 삼각대가 되었다.


"감사해요. STV '세상에 이런 동물이'에 출연을 결정해주셔서"


"아뇨, 별말씀을요. 이 놈이 잘하는 건 뛰는 것밖에 없는데 출연 제의를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그러니까 정황상 이들은 주인놈이 하도 뜀박질만 시켜서 살거죽만 남은 불쌍한 나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TV VM로그램에 출연을 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런 동물이' 라면 매주 금요일마다 주인이 애청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주인집의 소파 옆에서 길게 하품을 하면서 '저게 뭐가 재밌다고 나는 훨씬 잘할 수 있는데'를 생각하던 아주 우습게 여겼던 프로그램이었다.


"OTT에도 송출되는 건 알고 계시죠?"

"네, 요즘은 OTT가 대세아닌가요."


OTT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구독형으로 매월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영상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이었다. 내가 이렇게 똑똑하기까지한데 뛰는 것만 잘한다니 주인은 생각이 글러 먹었다.


"인서트로 멋지게 뛰는 장면부터 촬영해볼게요."


방송국에서 나온 검은 패딩의 사람들은 서로 촬영과 편집 방향에 대해 많은 상의를 해가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검은 바둑알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바둑알이라기보다 좀 더 먹구름에 가까운 걸까. 검은 무리들이 구름처럼 뭉쳤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며 하늘 저편에서 빠르고 조직적으로 다가와 어디에 뇌우 같은 걸 동반한 비를 뿌릴지 말지 결정하는 그런 족속 같았다.


-4편에 계속












월, 일 연재
이전 02화무지개는 울지 않는다 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