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d of the world
"어째서 태양은 여전히 밝게 빛나는가. 어째서 아침은 어김없이 오고, 새들은 지저귀고 있는가. 그녀가 떠났을 때 세상은 이미 끝나버렸는데."
마음을 통째로 옮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The end of the world'가 카페 한켠에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 받는 목소리의 소음에 묻혀 겨우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응, 여보세요"
핸드폰 액정에 반가운 이름이 떴다. 전화를 건 후배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잘 지냈어요? 오늘 뭐해요?"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러브콜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내 입에선 변명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 아쉬워요. 그 08학번도 모이기로 했거든요."
후배가 읊조리듯 '그'라는 대명사를 넣은 건 '그 사람'의 축약과 같았다. 아, 역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색함을 감지한 후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게 K는 남.. 남자친구랑 만난다고"
"남자친구가 생겼구나?"
"네, 선배. 그런데 진짜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남자친구가 선배랑 너무 닮아서 다들 놀랐어요. 우리끼린 K가 선배를 못 잊은 거 아니냐고 그런 얘기도 했다니까요."
묘하게 소리가 교차했다. 후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재즈음악이 점점 더 크게 귓가에 맴돌았다. 전화를 언제 끊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헤어지잔 말에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해버린 그녀는 산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게 돌아섰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걸친 고산마을에서 하얀 설산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후벼파듯 찔렀다. 총구처럼 겨눠진 강렬한 햇빛이 각막을 꿰뚫을 것 같았다. K가 아팠다. 나는 허둥지둥했다. 호기롭게 배낭여행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강한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길 거부하는 K를 걱정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흥선대원군이라는 한식당을 소개받게 됐다. 흥선대원군을 알려준 복학생 선배들은 할 도리를 마친 적토마처럼 기세 좋게 웃었다. 다람샬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플 때 한국 음식이라도, 혹여 미음이라도 먹으면 좀 더 빨리 나을 것만 같았다. 그들을 배웅한 뒤에 흥선대원군에 도착했을 때 의외로 우리를 맞이한 건 화톳장이었다.
"아가씨가 아프다고? 그럴 땐 뜨끈한 죽을 먹어야지. 그건 그렇고, 고스톱은 칠 줄 알고?"
K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서로의 당혹스러운 눈빛을 읽었고,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외국인데다가 아플 때 한국 음식을 먹게 되어 묘하게 감동한 우리보다 고스톱을 칠 수 있는 한국 사람이 왔다는 주인장의 감동이 한층 커보였다. 주인장이 냉큼 내온 모스그린 색깔의 담요와 화톳장을 들고 우리는 난생 처음 고스톱을 배웠다. 죽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K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고, 그녀의 양볼이 날씨 때문인지 고스톱을 배우는 데 열중한 탓인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동태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동안 독박을 쓸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런 상황과는 다르게 아픈 그녀가 걱정되어 허둥거렸던 마음이 놓여 배시시 웃음이 났다.
"둘이 교제한 지 얼마나 된거야?"
주인장이 빨간 화톳장을 부채처럼 펼치며 물었다.
"아, 저희는, 그게."
"뭘 새삼스럽게 그래. 남자친구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구만. 허허."
K의 상기된 얼굴보다 내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날의 온도는 갈색이었다. 아주 뜨겁지 않은데다가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한 색깔이었다. 처음으로 배워서 같은 그림이나 겨우 맞췄던 고스톱과 타국에서 맛보는붉은 김치와 상기된 연인의 얼굴과 군불에 익힌 고구마의 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날 누군간 노래를 불렀더라면 'The end of the world'를 노래하는 재즈 가수의 애절한 목소리와 정확히 대치되었을 것이다. 한결 기운을 되찾은 K는 깊은 밤에 밤하늘을 바라보며 느닷없이 말했다.
"있지, 이 다음엔 파키스탄 가볼까?"
그렇지만 파키스탄에 갈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도 내전 중인 파키스탄에 가는 건 위험한 짓이라며 내가 똑부러지게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K는 늘 의욕이 너무 앞서곤 했다.
"위험해."
K는 컴컴한 밤인데도, 별을 보는 데 집중한 나머지 낭떠러지 쪽으로 아무렇지 않게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부주의한 K의 손을 잡아끄는 건 내 몫이었다.
"아, 고마워."
"그럼 유럽에는 꼭 가자."
그날 밤 우리는 유럽의 매력적인 도시 이름들을 읊으며 장황하게 여행 계획을 수립했다. 그녀는 모든 곳을 가고 싶어했고,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런던엘 꼭 가야한다고 강조했었다. 실현되지 못할 약속, 유럽에 같이 가자는 약속도 영원한 사랑의 약속처럼 지켜지지 못했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헤어졌기 때문에, 싫증이 났기 때문에, 미웠기 때문에,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지킬 수가 없었던 약속으로, 마음 속에 뿌리깊게 박혔다.
어느 날, 여행 중에 한 인도 사내가 "You`re lucky"라는 말을 전졌는데 젊은 연인은 서로를 만나서 상대방이 행운인 거라며 한치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장소를 찾으러 이동하면서도 실랑이는 계속됐다. 속으로는 그녀를 만나서 얼마나 행운인지 잘 알면서도 젊은 연인은 도무지 한 발도 양보할 줄을 몰랐다. 언젠가 K가 나에게 광활한 사막에서 네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았고, 드넓은 바다에서 겁 한 번 내지 않고 천방지축 뛰어다닐 수 있었노라고 말했을 때 사실은 나야말로 너를 만나서 행운이었다는 점이 선명해졌고, 바로 그 점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끝난 후 할 일을 마친 K가 돌아서는 순간 진심어린 감정의 낟알들은 모두 산산히 흩어져 버렸다. 사실 그날, 실랑이가 시작된 젊은 연인의 뒤에서 인도 사내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었다.
"You both are lucky."